좋은 글, 유익한 글 74

'샘표 회장의 체험담'

박승복씨는 '샘표식품' 회장이다.올해 102세의 박승복회장은 피부가 50대 정도로 깨끗하고평소에 피곤을 전혀 모르고,약 30년간 병원에 간 일도 없고, 약을 먹어본 적도 없는 건강한 체질이다.지금도 주량이~ ⚘소주2병,⚘위스키한병,⚘고량주 한병이다.올해 98세 (22년생) 박승복 회장이 가장 많이 듣는말은 "녹용이나인삼 드세요? 무엇을 드셔서 그렇게 건강 하세요?" 라는 질문이다.그의 답은 늘같다. "아무거나 잘 먹는다.운동도 전혀 안한다. 골프,등산은 커녕 산책도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그만큼 하루가 바쁘다.😆중국,일본, 등에서 온 30~40대 바이어 들과 술로 대적해도 지지않는다."노인이라고 얕봤다가 큰코 다치지 하하하..😁." 하고 웃는다.병원에 가본 기억이 약30년전으로건강에 자신이 있지만 옛날..

당선된 국회의원에게... "이 원수 갚을 자 누구인가"

북한은 하는데 한국은 아무 소리 못해... 22대 국회는 '간토학살특별법' 제정해야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 일본 간토(關東) 지역에 규모 7.9의 대지진이 발생한다. 1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강진으로 동경을 포함한 관동지방 일대는 아수라장이 된다. 생존자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이 독버섯처럼 엄습한 가운데, 이 혼란을 틈타 재일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타고 방화와 약탈을 일삼는다는 유언비어가 빠르게 번진다. 일본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한다. 이때부터 군대와 경찰, 자경단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조센징'을 색출해 죽이는 대학살이 시작된다. 1923년 9월에 일어난 간토 학살(1923년)이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 수천 명이 무참히 살해된다. 6661명. 에 실린(1..

"가슴 따뜻한 "친구"

인생 팔십(傘壽:산수)이 되면 가히 무심이로다. 흐르는 물은 내 세월 같고, 부는 바람은 내 마음 같고, 저무는 해는 내 모습과 같으니 어찌 늙어 보지 않고 늙음을 말하는가. 육신이 칠팔십이 되면 무엇인들 성하리오. 둥근 돌이 우연 일리 없고, 오랜 나무가 공연할 리 없고, 지는 낙엽이 온전할 리 없으니 어찌 늙어 보지 않고 삶을 논하는가. 인생 칠팔십이 되면 가히 천심(千心)이로다. 세상사 모질고 인생사 거칠어도 내 품안에 떠 가는 구름들아! 누구를 탓하고 무엇을 탐하리오... 한평생 살면서 옳은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는데... 공자가 말하기를 酒食兄弟千個有 (주식형제천개유) 음식을 먹을때 형 동생하는 친구는 많아도 急難之朋一個無 (급난지붕일개무) 급하고 어려울 때 도움을 주는..

다산 (정약용)의 霞帔帖(하피첩)

霞帔帖(하피첩) [노을 하(霞), 치마 피 帔, 문서 첩(帖)] 霞帔帖(하피첩) 은 노을빛 치마로 만든 소책자이다. 2005년에 수원의 어느 모텔 주인이 파지를 마당에 내다 놓았는데 폐품을 모으는 할머니가 지나가다가 파지를 달라고 했다. 모텔 주인은 할머니 수레에 있던 이상한 책에 눈이 갔고 그는 책과 파지를 맞바꿨다. 그리고 혹시나 하고 KBS '진품명품'에 내놨다. 김영복 감정위원은 그 책을 보는 순간 덜덜 떨렸다고 했다. "진품명품" 현장에서 감정가 1억 원을 매겼고, 떠돌던 이 보물은 2015년에 서울 옥션 경매에서 7억 5,000만 원에 국립 민속박물관에 팔렸다. '霞帔'(하피)는 옛날 禮服(예복)의 하나다. 붉은 노을빛 치마를 말한다. 다산은 천주교를 믿었던 죄로 전남 강진으로 귀양을 갔었다...

人生 넋두리

父母 子息間 1寸이요 兄弟 姉妹間 2寸일쎄 4촌이면 다른 피 섞여 한 다리가 뜬다 하더이다. 돈 있고 권세 오면 사돈 팔촌 없어지고 잘나갈땐 喜喜樂樂 문중 종씨 따지다가 정승이 필요한가? 재벌이 중요한가? 힘 빠지고 기울면 막장에는 남 되더라 아내 남편 無寸이니 섞인 몸도 한 몸이라 친구 또한 무촌이니 촌수 아예 없잖은가? 平生감이 夫婦요, 함께감이 친구로다 서로서로 아껴야 부부요, 너나 나나 챙겨야 비로소 친구로다 없어도 부부요 못나도 친구다. 함께 같이 챙겨가며 보살피고 안부 묻고 축하하고 위로하세 그려 산채 나물 독주 일배 山이면 어떠하고 江이면 어떠한가 얼굴 한번 바라보고 술 한잔 돌려보고 손 한번 잡아보며 환하게 웃어보고 있는 얘기 없는 얘기 오고 가야 이어지지. 아내에게 못할 얘기 자식에게 못..

스님과 처녀의 러브스토리

여수에서 배를 타고 1시간 쯤 가면 돌산도"란 섬이 나온다. 지금은 차로 바로앞 까지 갈수있지만 당시엔 배로만 갈수있는 섬이었다 ​ 이 섬에 있는 금오산 중턱 바위절벽에 신라시대 때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수도한 향일암이 있다. ​ 울창한 낙락장송의 솔바람 소리, 온갖 기묘한 모양의 바위, 남해바다의 장쾌한 파도가 말 그대로 기막힌 절경이다. ​ 어느 날, 키가 훤칠한 미남 스님 한분이 순천 송광사로부터 향일암으로 왔다. ​ 나이 27살 법명은 지현, 스님은 절 주변을 알뜰하게 손질한 뒤, 백팔염주에 사바세계 번뇌를 실어 깊은 사념의 경지를 거닐고 있었다. ​ 그동안 폐사처럼 버려져 있던, 향일암에는 이로부터 여신도들이 몰려 들었다. 낭랑한 목소리에 인물 좋고, 경치마저 절경이어서 그는 곧 바로 향일암의 ..

지금 한글은 누구나의 손안에 있다

"나랏말ᄊᆞ미 듕귁에 달아 문ᄍᆞᆼ와로 서르 사ᄆᆞᆺ디 아니ᄒᆞᆯᄊᆞㅣ" 로 시작하는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말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않으매 백성들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므로 이를 가엾이 여겨 새로 글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람마다 쉽게 익혀 널리 쓰이기 바랐던 한글은 그러나 세종대왕의 바람처럼 널리 쓰이지 못했다.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가 올린 상소문을 필두로 하여 한글 창제를 둘러싸고 양반 식자층이 거세게 반발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한글 창제를 반대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하나, 백성들이 글을 갖게 되면 지배층이 누렸던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 때문이었다고 보는 ..

<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 >

한 미국인 사업가가 멕시코의 작은 바닷가 마을로 휴가를 갔는데 마침 그곳에서 작은 배를 타고 들어 오는 어부 한 명을 만나 말을 걸었습니다. ​"이것들을 잡는데 얼마나 걸리셨어요?" "많이 안 걸렸수다." "그럼 더 많이 잡을 수도 있었겠군요. 더 많이 잡으면 돈도 더 많이 벌 수 있지 않아요?" "뭐, 가족들 먹을 정도랑, 친구들 나눠 줄 정도만 있으면 되는 걸..." "그럼 남는 시간에는 뭐 하시는데요?" "낮 잠 좀 자고, 아이들과도 좀 놀고, 아내와도 좀 놀고, 뭐 그런다오. 저녁에는 마을을 어슬렁 거리다 친구들 만나면 포도주도 한 잔 하고, 기타도 치고, 뭐 그러고 보내지요." 이 말을 듣자 미국인 사업가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저를 아실지 모르겠지만,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에서 MBA 를 마쳤습..

[삶] 한국 대 스웨덴, 9 대 0…너무 창피하고 부끄럽다

"스웨덴 국회의원 보좌진 1명도 없는데 한국은 9명이나 보유" "걷거나 자전거로 출근하는 스웨덴 국회의원" "사무실은 한국의 10분의 1도 안되는 3∼4평" "법안은 4년 재임중 1인당 70건…1년에 18건" "지방의원은 월급 없어…밤이나 주말에 회의" [※ 편집자 주= 최연혁 스웨덴 린네 대학교 교수 인터뷰는 분량이 많아 세 차례로 나눠 송고합니다. 이번 기사가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인터뷰 기사도 조만간 송고할 예정입니다.] 연합뉴스와 인터뷰 중인 최연혁 교수 [촬영 김수지·김민수] (서울=연합뉴스) 윤근영 선임 기자= "한국 국회의원 특권은 180여가지라고 하는데, 스웨덴 국회의원들에게는 그런 것이 아예 없습니다. 국회의원은 봉사와 희생의 직업이기에 의원들 스스로 그런 걸 누리려 하지 ..

떡국 이야기

초하룻날, 떡국이 팔릴 것 같지 아니하여 화동 어떤 떡국집 주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서울에 집이 있는 사람이야 누가 오늘 같은 날 떡국을 못 먹겠습니까마는 오늘 떡국을 먹지 못하면 까닥없이 섭섭하다 하여, 부모를 떠나 시골서 올라온 학생들의 주문이 하도 많기에 이렇게 문을 열었습니다. 〈지방 학생 위해 떡국집은 개점〉 1926년 2월 14일자 동아일보 4면 예나 지금이나 설에 떡국을 먹지 못하면 섭섭했던 건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기사가 쓰인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음력설은 홀대하고 양력설을 강요했던 일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문에서 떡국 먹는 풍속 등 명절 분위기를 담을 만큼 음력 설은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이중과세'(二重過歲)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양력 설 한 번만 챙길 것을 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