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학자, 독립운동가, 자는 탁수(琢叟), 호는 묵재(默齋)(1886.12.24.~1978.4.2.) 본관은 一直. 경북 칠곡군 석적면 반계리 352번지에서 전통적 유교가문의 경헌(慶憲)과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 3남 2녀중 3남으로 태어났으며, 슬하에 무호(武鎬), 재호(在鎬) 2남을 두었다. 21대조는 고려 말 판삼사사를 지낸 홍량(洪亮) 정평공(靖平公)이며 17대조는 조선 세종 때 문신 조서(肇瑞) 격제공(格齋公)이며 9대조는 이겸(以謙) 사과공(司果公)이며 처(妻)는 인동장씨(仁同張氏)이다.
소년기의 손기찬(孫基瓚)은 남다른 의협심과 기개를 가지고 聽石 李相標(고종때 문신,承政院 注書역임)선생의 문하에서 한학(사서삼경)과 충효를 배우며 성장했다. 열강이 대립하는 국제정세의 소용돌이 속에 몰린 대한제국 말 일제는 청일전쟁 승리의 기세를 이어가며 자국의 이권강화를 위해 을미사변(1895년11월 국모시해 사건)을 일으켰다. 국모시해로 반일감정이 악화되자 일제는 지식인 계층의 유생들을 제도권에 넣어 억압하는 통제 수단으로 단발령(동년11월 상투 삭발령)을 내렸다. 이에 손기찬은 어린 나이였지만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신체, 머리카락, 피부는 부모한테 물려받은 것으로 몸을 소중히 하는 것이 효도)란 이유로 반대하며 상투를(작고 당시까지) 자르지 않았다. 충효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며 大義를 깨달아가던 청년기에(21세) 일제는 乙巳勒約(1905년)으로 한층 더 국권이 침탈당하는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접하고 불의와 맞서 싸울 일념을 더욱 공고히 가지게 되었다.
1906년 3월경 경북 영천지방에서 鄭鏞基대장을 중심으로 일어난 山南義陣에 가담하여 대한제국 말기 군에 입대 대구진위대에 복무 중 해산당한 후 의병에 가담한 禹在龍과 교분을 쌓았다. 禹在龍은 전직 군인으로 무기관련 지식도 많아 손기찬의 집에 장기간 寄居하며 손기찬과 함께 소의 오줌버캐, 사기(유리)조각, 유황, 화약 등을 섞어 폭탄(일명:自起丸) 제조에 힘쓰며 의병모집과 무기를 마련하여 입암리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런 노력과 헌신이 있었지만 1907년 9월에 죽장면 입암리 전투에서 鄭鏞基대장이 일본군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는 비운을 맞았다. 鄭煥直은 2대 의병대장을 맡아 분발했으며 손기찬은 경산.하양지역 의병모집 및 무기담당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2개월여 후 鄭煥直대장마저 일본군에 체포되어 총살당하는 비극을 겪으며 더욱 항일 독립투쟁에 대한 의지를 다졌으나, 조직이 약화된 山南義陣은 崔世允을 3대 의병대장으로 추대하여 조직을 재건하며 일본군에 맞섰으나 수적인 열세에 밀려 많은 희생이 뒤따르고 와해되는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산남의진 의병활동 이후 한일합방(1910년 8월)으로 일본의 식민통치가 본격화되면서 조국광복과 국권회복을 위한 방안을 고민하던 손기찬은 1913년 12월 영주 풍기에서 蔡基中과 대한광복단 결성에 참여하였다. 1915년 朴尙鎭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과 연합을 위해 詩會로 가장한 달성공원 집회에(동년 8월25일) 200여명의 일원으로 참석 대한독립을 위해 자자손손 계승하여 싸울 것을 혈맹으로 다지며 대한광복회로 개칭 발족함과 동시에 활동방향 등을 결의하고 朴尙鎭을 총사령으로 추대하였다. 대한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이 연합으로 군사조직으로 세력을 재편한 대한광복회는 총사령 朴尙鎭이 사재를 출연 설립한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라는 곡물상회를 중심으로 군자금 조달, 무기구입, 친일요인 암살 등 활동을 넓혀나갔다.
손기찬은 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서 영암의 현기봉, 공주의 김갑순, 대구의 이상기 등의 집에 동지들과 함께 찾아가 군자금을 모금 조달하였으며, 칠곡의 대표적 친일부호로 악명이 높던 장승원 처단을 위해 우재룡이 맡겨두었던 권총 4정을 자가에 몇 달간 보관하고 있다가 짚단 더미로 위장하여 1917년 11월7일 약목시장으로 가져가 禹在龍,姜順弼,庾昌淳,林世圭에게 1정씩 교부하고, 거사현장(장승원집) 부근의 지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손기찬은 장승원의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저전(猪田)나루터에(현 구미시 오태동 낙동강 부근 ) 도선을 준비하여 탈출을 돕는 일을 나눠 맡는 등 친일파 처단에 깊이 관여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장승원 처단 직후 “왈유광복(曰維光復) 천인시부(天人是符) 성차대죄(聲此大罪),계아동포(戒我同胞) 성계인광복회(聲戒人光復會)” "외치는 바는 광복이다. 하늘과 사람이 도리에 일치된다. 너의 큰 죄를 꾸짖고, 우리 동포에게 경고를 주노라. 꾸짖고 경고하는 자, 광복회"라는 격문을 붙여 광복회가 행한 일임을 알렸으며, 이어 충청남도 아산의 친일파 도고면장 박용하를 암살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
잇따른 암살이 이어지자 관련자 색출에 혈안이 된 왜경의 감시도 더욱 강화되었으나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금, 무기마련, 친일세력 처단으로 위세를 떨치며 세력을 넓혀갔다. 그러던 1917년 12월 경 군자금 모금에 반감을 가진 광복단원인 이종국(李鐘國)의 천안경찰서 밀고로 대한광복회의 정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총사령 박상진을 비롯한 단원 여러 명이 무더기로 체포되며 손기찬도 체포 구금신세를 면치 못하고 왜경의 온갖 방법이 동원된 고문(대나무 송곳, 고춧가루 이용)에 시달리는 고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가족의 고난사가 뒤따랐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며 구금기간에 더 보관하고 있는 무기(권총 등)를 찾기 위해 가족이 살고 있는 집 지붕까지 해체하여 조사하는 등 가족까지 못살게 구는 악행은 날이 갈수록 심도를 더해 갔다. 이런 멸시와 탄압, 회유와 협박이 반복되며 재판이 진행되었고 공주지방법원 1심에서 징역3년을 언도받고(1918.10.19.) 항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태형 90도로 감형되어 가혹했던 재판이 끝나고 형기를 마치게 되었다.(1919.9.22.)
의병활동을 시작으로 장기간의 항일투쟁과 구금상태로 재판과정을 거치면서 부유했던 살림은 많은 가산손실과 신체적 고문 등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최악의 상태로 피폐해졌으며,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어 손기찬의 거주지 주변에는 총칼로 무장한 왜경의 기마 순찰은 더욱 강화되었다.
친인척이 집을 다녀가도 경찰서에 불러 조사하는 등 지인들과의 교류도 어려웠으며, 왜경의 감시의 눈초리는 계속 이어져 생계활동 마저 어렵게 되었다. 이런 위기를 조금이나마 극복하고자 1929년 경북 상주시 화북면 중벌리 526번지 첩첩산중으로 이주하였다. 이주 후 일제의 감시는 계속 뒤 따랐지만 손기찬은 한문교사로 활동, 지역사회 후학양성에 힘쓰면서도 조국광복과 국권회복을 위한 일념은 버리지 않았다.
그러던 1931년 가을 鄕里의 청년들에게 한문을 강습한 교육활동을 가지고 계몽사상을 고취시킨다는 억지주장의 이유를 들어 倭警이 國事犯으로 몰아 대구지방검찰청에 기소되었다. 이 사건은 혹독한 조사과정을 거친 후 검찰에서 무리한 기소였다는 판단으로 보안법 위반을 적용 2개월 구류처분 후 석방되었다. (2개월 구류처분 내용은 아들(武鎬)이 면회를 몇 번 가서 멸시의 눈초리와 구타까지 당한 사실을 증언한 내용으로 6.25전란이나 관공서이관 등 기록이 없어지고 찾을 수 없음)
손기찬은 생존 시 항일 독립운동의 행적을 찾으려는 장남(武鎬)에게 올바른 정치가 들어서면 다 밝혀지는 일이라며, 자신을 위해 한 일도 아니고 나라를 위한 일인데 찾을 필요가 없다는 말로 일괄했다.
1906년 山南義陣 의병활동을 시작으로 광복단 항일운동으로 인해 도피 및 구금생활로 이어지며 1919.9.22. 형기를 마치기까지 장장 13년 이상을 나라를 위해 투신하며, 부유했던 가정은 피폐해지고 구금상태에서의 고문 후유증이 심해져 돌아가시기 전 10년가량을 대소변도 받아내며 누워서 생활했다.
1977년 조국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기록을 찾아 국가보훈처에 공적심사를 신청하였으나 생전에 결과를 듣지 못하고 1978.4.2일 93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 후 3년여가 흐른 1980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현재 죽장면 입암리 죽장고등학교 뒤, 영주 풍기 광복공원, 상주시 남산, 상주 용화초등학교 정문에 추모비가 세워져 있으며 묘지는 대전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손자 손한승 씀
'애국지사 손기찬(孫基瓚)' 카테고리의 다른 글
諱字수정 요청(2018) (0) | 2018.02.26 |
---|---|
손기찬 사진, 훈장증, 묘소 (0) | 2018.02.26 |
대한광복단(회) (0) | 2018.02.24 |
山南義陣 發祥紀念碑를 찾아서 (0) | 2017.08.12 |
조부님 諱字 수정(2012년) (0) | 2012.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