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손기찬(孫基瓚)

대한광복단(회)

용화(龍華) 2018. 2. 24.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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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복단 略史

광복단은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합된 뒤, 독립을 위한 혁명전사를 양성하고, 무력으로 국권회복을 이를 목적으로 전국 각지에서 모인 의병 출신 지사들을 주축으로 풍기에서 만들어진 독립운동단체이다.

19133월 풍기서부 한림 촌에 사는 채기중을 중심으로 류장열(고창) 한훈 김병열(청양) 김상옥(서울) 정운기(괴산)장두환 유창순 조종철 류중협(천안) 정만교, 황상규, 문봉래, 채경문(풍기), 강순필(봉화) 정진화(예천) 성문영(아산) 이수택, 손기찬(칠곡)등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무장비밀결사인 풍기광복단을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25년 대구의 박상진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조선국권회복단과 발전적으로 통합한 후 대한광복회로 조직을 확대하고,

우리는 대한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죽음으로써 원수 일본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천지신명에게 맹세한다.”라는 선언문을 작성 피로써 맹세하고, 다음과 같은 실천 방안을 세워 활동하였다.

1)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하고,

2)남북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사를 양성하며,

3)종래의 의병 및 해산군인 만주 이주동포를 소집하여 훈련하고,

4)중국 러시아 등 여러나라를 통하여 무기를 구입하며,

5)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만 각 요지와 북경 상해 등에 그 지부를(여관 곡물상. 광무소등) 두어 연락기관으로 하며,

6)일인고관 및 부일반역자를 수시로 처단하는 행형부를 두며,

7)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의 목적 완성을 기한다 

대한광복회는 그 조직을 군대식으로 편성하여 박상진이 국내의 총사령이 되고, 이석대가 부사령으로 만주지방을 담당하였는데, 이석대가 순국하자, 김좌진이 부사령으로 활동하였다. 19167월 의병장 허위의 선봉장이었던 권백초(상석)를 밀파하여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칠곡의 친일부호 장승원을 응징 사살하려다 실패하고, 8월에정운일,김진만,김홍두,최병규,김진우,등도 대구 부호 서우순에게 군자금을 모금하려다 실패하여 일경에 체포되었다. (이를 광복단의 대구 권총사건이라 함)

1916년노백린,김좌진,신대현,윤홍중,신두현,윤치성,박성태,김정호,권태진,임병한,윤영중,기명섭,이현등유명한 투사들이 참가하면서 조직을 재정비하여 대한광복단으로 개칭하였다.

1917년 기호. 호남. 관동. 관서지방의 애국지사 장두환, 최만식, 김재창,김경태, 황학성,김상준,이재덕,정태복,성달영,강석주,조종철,정우풍,김원묵,김재철,김재풍김동호등이 참가하여 명실공히 거국적인 독립운동단체로 자리하면서 회원이 수백명에 이르게 되었다.

박상진,김한종,채기중,우재룡,김좌진 등 간부들은 서울 남대문 밖 어재하의 남일 여관에 모여 본격적인 투쟁방안을 협의하여, 노백린은 상해로 김좌진,박성태는 만주로 박상진,채기중은 영남지방 장두환,김한종등은 기호지방 이관구 는 황해지방 김홍두,한훈은 호남지방, 조현균은 평안지방을 당하여 각 지방의 부호들을 조사한 후 격고문을 보내어 의연금을 권유하는 동시에 일제가 징수한 세금을 압수하여 무기구입을 하기로 하였으며, 서울은 어재하 인천은 이재덕 대구는 박상진 경주는 최준, 괴산 엄두견 영주은 권영목 풍기는 채기중, 박제선을 연락책으로 임명하여 활동하였다.

191711월 채기중,임세규,유창순,강순필등은 칠곡 친일부호 장승원을 처단한후 일유광복(日維光復),천인시부(天人是符),성차대죄(聲此大罪),계아동포(戒我同胞),성계인(聲戒人),광복단이라는 격고문을 붙여 광복회가 만천하에 알려지게 되었고

19171226일에는 우재룡,권영만 등이 경주 광명리 앞 길에서 대구로 수송 중이던 경주 영일 영덕군에서 강제로 거군 세금 팔천칠백원을 빼앗아 군자금으로 충당하기도 하였으며1918124일 우재룡이 전달한 권총으로 김한종, 장두환, 임세규,김경태 등은 충남 아산군 도고면장 박용하에게 사형 선고문을 제시하고 처단함으로써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으며 한훈의 지휘로 유장열, 곽경열, 이병하 등은 전남 보성군 득량면 박곡리의 양재학을 처단하고 유장열, 이병온 등은 보성군 벌교읍의 악질부호 서도현등 악질반역자들을 처단하여 대한광복회의 활동이 만천하에 드러나자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총동원하여 수사망을 펴고 거액의 정보비를 뿌리며 혈안이 되었는데 191712월에 천안의 이종국이 천안경찰서에 밀고하여 마침내 광복회의 조직이 발각되고 우편물검열로 1918년 본 김한종, 박상진, 채기중, 임세규, 강순필, 김경태, 장두환, 이병온, 장남칠등이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0년 심영택, 소진형의 주비단과 합류한 우재룡, 권영만과 김상옥의 암살단과 합류한 한훈이 활동 중 피검됨으로써 풍기광복단의 중심인물들이 모두 체포 구금되었다.

일경에 체포된 400여명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며 19208월 박상진,김한종은 대구에서 채기중,김경태,임세규,는 서울에서 처형순국하였고 장두환은 서울 마포형무소에서 혹독한 고문으로 순국하였다.

이 무렵에 체포 구금된 광복단원은 다음과 같다. 명단생략(85)등이다

대한광복회는 국내 및 만주지역에까지 조직망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19193.1운동과 1920년대의 독립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준 단체로서 많은 단원들이 구금되고 순국하였거나 해외로 망명을 하자 일시적으로 활동이 위축된 듯 보였으나 남은 단원들은 한훈을 중심으로 다시 뭉쳐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면서 우리의 독립의지를 드높인 광복단이 이 고장 풍기에서 조직되고 풍기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우리는 가슴 뿌듯한 긍지로 간직하면서 선열들의 거룩하고 고귀한 뜻이 길이 후손에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돌에 새긴다. 

                                                                           * 1995815일 김계하 모으고 송종섭 지은 비문

 

2. 기념비문

사람은 양심의 힘으로 살아가고 사회는 정의의 길따라 발전한다. 여기 양백의 줄기가 만들어낸 풍기벌판에 그 양심과 정의의 기록이 우뚝하니 멀리는 의상과 안향과 금성대군의 행적부터 가깝게는 이 고장의 애국지사가 참여한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혁혁한 사적이 청사에 아로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에서 1913년에 결성한 광복단은 대한제국 일제침략으로 멸망한 후 국내에서 일어난 최초의 독립운동단체로서 한국근대사에서 남다른 각광을 받고 있다.

광복단은 구한말 의병전쟁에 몸바쳐온 팔도의 의사들이 이곳 풍기에 모여 채기중을 중심으로 결성하였다 1915년에는 대구에 결성되어 있던 조선국권회복단의 박상진과 손잡고 그를 총사령으로한 대한광복회로 개편하였다. 대한광복회는 일제의 식민체제를 전복하고 독립을 쟁취하여 공화국을 건립 한다는 원대한 꿈을 세우고 있었다.

구시대의 봉건사상을 극복하고 근대국가 수립을 표방한 것이다. 그리하여 영주의 대동상점,대구의 상덕태상회 서울의 남일여관과 광주 예산 인천 해주 용천등지의 곡물상 또는 잡화상점을 거점으로 전국에 일백처럼 혁명기지를 건설해 갔다. 아울러 비밀,폭동,암살,혁명을 행동지침과 목표로 삼아 자금과 동지를 모집하고 무기를 비자하며 전 민족이 봉기할 혁명전쟁을 준비하였다.

한편 이용진,김좌진,손일민,이관구 등으로 하여금 만주에도 거점을 확보하고 때마침 진행 중이던 신흥학교의 독립군기지사업과도 긴밀히 연락하고 있었다. 1917년에는 혁명의 전초작업으로 친일부호를 처단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임세규는 칠곡에서 김한종은 아산에서 이병호는 보성에서 한훈은 별교에서 성과를 올려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섬광처럼 빛났다. 그리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할 혁명전야의 흥분이 온 겨레를 긴장시켰다.

그때 의사들은 친일배를 처단 한자리에 광복회의 격고문을 남겨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러한 우직함이 탈이었던가 1918년에 들어서자 전국의 조직망이 발각되어 많은 의사들이 일제의 형장에서 처참하게 그러나 장엄하게 순국하였다. 어찌 헛될 수 있으랴 광복회는 운명을 다했지만 그 유지는 이듬해 3.1운동의 함성을 드높인 밑거름이 되었고 또 황상규 김상옥 오재룡 권영만등 남은 의사들은 주비단 암살단 의열단 등의 다양한 조직을 일으켜 독립운동을 고양시켰다.

그 모두가 광복회의 희생 위에서 만발한 꽃이 아니더냐 어떻게 만세토록 기리지 않으리요 광복50주년을 맞아 겨레의 뜻을 모아 서석을 세우니 지나는 길손들은 옷깃을 여미라.                                                                   

                                                                              * 1995815일 조동걸 짓고 김태균 쓴 비문

  

3. 역사적 의의

대한광복단은 국권상실 후 국내에서 결성된 최초, 최대의 무장독립운동단체였다. 의병, 지사 출신의 전투적인 인물들로 구성되었으며 일본제국주의와 정면 대결을 처음부터 지향하였다. 이러한 투쟁방향에 공감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가입하여 1915년 대한광복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대한광복단은 대한광복회로 개편된 후 조직과 활동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군대식 조직체계를 갖추고 국내와 만주에 거점을 설치한 혁명적 항일 단체로 성장한 것이다. 이러한 발전을 바탕으로 만주에 군대를 양성하여 기회가 오면 무력으로 일제를 섬멸한다는 원대한 전략을 수립하였다.

대한광복단()의 항일투쟁이 거둔 가장 빛나는 성과는 1917년부터 추진된 친일파 처단이었다. 경상, 충청, 전라지방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 의열투쟁은 거사의 시점과 파급효과면에서 일제와 당시의 친일세력들에게 심각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대한광복단()은 친일, 반민족지주들을 제1의 타도대상으로 설정하고 민족적 심판의 차원에서 그들을 처단하였다. 이들에 대한 응징은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경고의 의미와 함께 침체되었던 우리민족의 국권회복의지를 되살리기 위한 목적에서 결행된 것이었다. 대한광복단()의 친일파 처단은 당시 국내의 독립운동단체가 감행할 수 있었던 최선의 독립투쟁이었다. 그리고 이는 여타의 항일민족세력들에게 중요한 행동모델인 동시에 역사적 귀감이 되었다.

대한광복단은 일관된 투쟁목표와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암흑기의 한국독립운동을 이끌어 갔다. 대한광복단에서 대한광복회로 다시 광복단결사대로 조직은 변천하였고, 여러 차례의 위기를 겪었지만 무력에 의한 국권회복이라는 목표만큼은 흔들림 없이 추진되었다.

1910년대 이들이 흘린 피는 이후 광복의 순간까지 우리민족이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대한광복단의 정신과 투쟁은 독립운동사 뿐 아니라 전체 우리 민족사의 자랑스러운 성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4. 정신

1) 비밀, 폭동, 암살, 명령

2) 7대 투쟁방략

) 부호의 의연 및 일본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이로써 무장을 준비한다.

) 남북만주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 종래의 의병과 해산군인과 만주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 중아제국(중국, 러시아)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일체의 연락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한만요 지와 북경·상해 등에 여관 또는 광무소를 두어 연락기관으로 한다.

) 일인고관 및 한인반역자를 수시수처에서 처단하는 행형부를 둔다.

) 무력이 완비 되는대로 일본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의 목적을 단행한다.

3) 격고문

" 曰維光復, 天人是符, 聲此大罪, 戒我同胞, 聲戒人, 光復會 "

- 외치는 바는 광복이다. 하늘과 사람이 도리에 일치된다. 너의 큰 죄를 꾸짖고 우리 동포에게 경고를 주노라. 꾸짖고 경고하는자,광복회 -  

4)선언문

" 우리는 대한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죽음으로써 원수 일본을 완전히 몰아 내기로 천지 신명에게 맹세한다 "

      

 5. 연표

1913 풍기에서 대한광복단 최초 조직 결성(채기중)

1914 충남 직산 금광 잠입 군자금 모집(김대지)

충북 근북면 사무소 습격(강병수)

1915 대구에서 대한광복회로 조직확대(박상진, 채기중, 이관구)

영주 대동상점 개설(박제선, 권영목)

경주 광명리에서 일제 세금수송마차 습격(우재룡, 권영만)

1916 만주 사령관에 이석대(본명 진룡) 임명. 김좌진, 노백린 합류

보성,벌교의 친일파 양재학, 서도현 처단,

오성 헌병대 습격 무기 탈취(한훈, 김상옥, 유장렬)

조선총독 데라우치 암살기도(이관구, 성낙규, 조선환)

대구 부호 서우순으로부터 군자금 수합(일명 대구권총사건, 박상진, 김진만, 김진우)

평북 영변에서 동양금광회사 소속 현금마차 습격(이석대(진룡), 조맹선)

강원도 영월 중석광산 잠입 군자금 모집(채기중, 강병수)

우수리스크 니콜리스크(蘇王嶺)에 기지건설 추진(이관구)

1917 만주 사령관 이석대(진룡)의 후임으로 김좌진을 임명하여 중국에 파견(박상진)

장춘에 독립운동 연락기지 상원양행 설립(이관구, 채수일, 명문흡)

황해도지부장 이관구가 경영하는 광제병원 확장비로 당시 4천원을 투자받음

길림에 조선독립기관본부 설치 추진(우재룡, 안창일)

군자금 모집을 위해 전국의 부호들에게 통고문 발송(박상진, 채기중, 우재룡)

경북 칠곡의 친일지주 장승원 처단(채기중, 유창순, 강순필)

충남 아산의 친일면장 박용하 처단(김한종, 김경태)

광복회,신한국보,재무총장등의 도장과 국권회복취지서를 만듦(이석희)

1918 일제에 의해 조직 발각, 지도부와 단원들 연이어 검거

1919 경성고법 박상진, 채기중, 김한종, 임세규, 유창순에게 사형 선고

1920 생존단원들 서울에서 광복단결사대와 암살단 조직(한훈, 김상옥)

광복단결사대 군산, 김제, 광주에서 군자금 모집(한훈, 박문용)

광복단결사대 미국의원단의 방한에 맞춰 총독 및 고관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 한훈 피체 김상옥 상해로 탈출

1945 대한광복단 재건(한훈, 양한위, 유연원)

서울 견지동에 본부 설치. 재건 선언문, 강령, 단규, 단칙 발표(한훈)

광복의숙 설립 추진

1946 영천 입암에서 산남의진전순장병 위령제 거행

신탁통치 반대운동 돌입, 반탁시위를 위한 행동방침, 투쟁공약, 격문 발표

1947 순국선열추도제 거행(신도지부)

1950 한훈 6.25전쟁 중 논산에서 인민군에 의해 학살, 재건대한광복단 해체

 

 

 6. 광복()원 명부

강동성(姜東成)강석주(姜奭周)강순향(姜順饗)강순필(姜順必)

강응오(姜應五)강정균(姜正均)강정만(姜正萬)강창순(康昌淳)

고성후(高成厚)고제신(高濟臣)곽경렬(郭京烈)구자용(具滋 )

권백초(權百草)권영만(權寧萬)권영목(權寧睦)권영묵(權寧?)

권의식(權義植)권재점(權宰点)권준의(權準義)권준흥(權準興)

권중수(權重秀)권중식(權重植)권태진(權泰鎭)기명섭(奇明燮)

기재연(奇載璉) 김경태(金敬泰 永根)김광열(金光烈)김교락(金敎洛)

김교위(金敎胃)김규진(金奎鎭)김노향(金魯鄕)김대지(金大池)

김동수(金東洙)김동완(金東完)김동호(金東鎬)김립관(金笠館)

김병렬(金炳烈 然)김병식(金炳植)김상옥(金相玉)김상준(金相俊)

김석연(金石然)김선호(金善浩)김성묵(金成?)김성우(金成禹)

김영근(金永根)김영하(金榮夏)김영환(金暎煥 英)김완묵(金完?)

김용한(金龍漢)김운서(金雲瑞)김원묵(金元?)김원식(金元式)

김일범(金溢範)김재열(金在烈)김재용(金在容)김재인(金在仁)

김재점(金在點)김재정(金在貞)김재창(金在昌 德)김재철(金在哲)

김재풍(金在豊)김재호(金在浩)김재창(金在昶)김정세(金正洗)

김정호(金鼎浩)김정호(金正鎬)김제원(金濟元)김좌진(金佐鎭)

김진만(金鎭萬)김진우(金鎭瑀)김차범(?)김창규(金昌奎)

김철호(金哲鎬)김태묵(金泰?)김태수(金泰守)김한종(金漢鐘)

김현식(金賢植)김홍두(金弘斗)김후병(金厚秉)남정황(南廷晃)

노백린(盧伯麟)노상목(盧相穆)노재성(盧在成 誠)노하룡(盧河龍)

마재원(馬在源)명문흡(明文洽)문봉래(文奉來)문응극(文應極)

문재교(文在敎)박노황(朴盧晃)박민동(朴民東)박봉래(朴鳳來)

박상진(朴尙鎭)박선양(朴善陽)박성주(朴性宙)박성태(朴聖泰)

박용채(朴龍埰)박원동(朴元東)박일석(朴一石)박장희(朴壯熙)

박정래(朴正來)박제범(朴薺範)박제선(朴濟璿)박행일(朴行一)

변동식(邊東植)변동환(邊東煥)변두섭(邊斗燮)서대순(徐大順)

성낙규(成樂奎)성달영(成達永)성문영(成文永)손기찬(孫基瓚)

손양윤(孫亮尹)손일민(孫一民)손중응(孫中應)송인황(宋寅璜)

송태현(宋泰鉉)신기식(申基植)신기하(申基河)신두현(申斗鉉)

신부위(申副位)신양춘(申陽春)신옥현(申玉鉉)신철균(申喆均)

신태응(申泰應)신하식(申河植)신현대(申鉉大)심국형(沈國亨)

심영택(沈永澤)안랑기(安廊其)안승국(安承國)안일장(安一?)

안창수(安昌洙)안태승(安泰承)양기택(梁起澤 啓)양봉제(梁鳳齊)

양재홍(梁在鴻)양제안(梁濟安)양택선(梁擇善)양한위(梁漢緯)

어재하(魚在河)엄정섭(嚴正燮)오찬근(吳讚根)오혁태(吳赫泰)

우재룡(禹在龍)우재성(禹在成)우재원(禹在源)유명수(柳明洙 秀)

유시만(柳時萬)유예천(劉禮泉)유장렬(柳璋烈) 유중근(柳重根)

유중석(柳重錫)유중협(柳重協)유진태(兪鎭泰)유창순(庾昌淳)

유태희(兪泰熙)유해초(柳海草)유희로(兪熙老)윤기중(尹奇重)

윤래향(尹來鄕)윤영중(尹瑩重)윤자도(尹子度)윤정식(尹禎植)

윤창하(尹昌夏)윤충하(尹忠夏)윤치성(尹致晟)윤홍중(尹弘重 洪)

이 각(李 覺)이 현(李 鉉)이각렬(李珏烈)이관구(李觀求)

이관규(李觀珪)이교원(李敎愿)이근석(李根奭)이근영(李根永)

이기현(李起鉉)이내성(李乃成)이덕재(李德宰)이동휘(李東輝)

이동흠(李棟欽 東欽)이명호(李明鎬)이문성(李文成)이병기(李秉基)

이병옥(李炳玉)이병찬(李秉燦) 이병하(李秉夏)이복우(李福雨)

이복현(李福賢)이봉의(李鳳義)이상헌(李相憲)이석대(李奭大 鎭龍)

이석홍(李錫弘)이석희(李錫熹)이성렬(李聖烈)이순구(李純久)

이시영(李始榮)이윤상(李允庠)이재덕(李在德 植)이정렬(李正悅)

이정찬(李庭燦)이정희(李庭禧)이종대(李鍾大)이종영(李鍾? )

이종하(李鍾夏)이종흠(李鍾欽)이찬영(李贊永)이창세(李昌世)

이철순(李哲淳)이춘식(李春植)이치모 (李致模)이태의(李泰儀)

이학희(李鶴喜)이항승(李恒承 瑄)이형덕(李亨德 洛)임동수(林東洙)

임병한(林炳翰)임봉주(林鳳柱)임석호(林石鎬)임세규(林世圭)

임창현(任昌鉉)장두환(張斗煥)장진홍(張鎭弘)정동근(鄭東根)

정란교(?)정래붕(鄭來鵬)정만교(鄭萬敎)정성산(鄭性山)

정세여(鄭世汝)정송산(鄭松山)정숙례(鄭肅禮)정우풍(鄭雨豊 禹)

정운기(鄭雲淇)정운일(鄭雲馹)정응봉(鄭應鳳)정인행(鄭寅行)

정재목(鄭在穆)정진화(鄭鎭華)정태복(鄭泰復 淳)정항준(鄭恒俊)

조백영(趙伯永)조봉하(趙鳳夏)조선환(曺善煥)조성일(曺聖一)

조승태(曺承兌)조용승(趙鏞昇)조용필(趙鏞弼)조유헌(曹裕軒)

조인혁(曹寅爀)조재하(趙在夏)조재화(趙載和)조종철(趙種哲)

조현균(趙賢均)주진수(朱鎭洙)채경묵(蔡敬?)채경문(蔡敬文)

채기중(蔡基中)채수일(蔡洙一)채태성(蔡泰成)채형주(蔡亨周)

최 준(崔 俊)최근초(崔根草)최기배(崔基培) 최면식(崔勉植)

최병규(崔炳奎 丙圭)최윤수(崔允守)최익환(崔益煥)최인규(崔麟奎)

최준명(崔俊明)최준성(崔俊成)최현철(崔鉉澈)편강렬(片康烈)

한 훈(韓 焄)한기동(韓基東) 한영복(韓永福)한운수(韓運壽)

한진교(韓鎭敎 普)한진달(韓鎭達)홍현주(洪顯周)황상규(黃尙奎 相)

황학성(黃學性)

 

 

 

 7. 주요활동

대한광복단()은 국내외에 다양한 형태의 거점을 설치하여 활동기지로 운영하였다.

이들 중 대표적인 것은 영주의 대동상점과 대구의 상덕태상회였다. 이외 삼척, 관주, 예산, 연기, 인천 등에 곡물상을 가장한 거점이 개설되었으며, 서울의 남문여관, 광주의 광일여관 등도 연락장소로 활용되었다. 개인자택인 안동의 이종영 집에서는 친일부호에게 보내는 경고문 작성, 장승원 처단모의 등이 이루어졌다.

대한광복단()은 중국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병력을 양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만주의 근거지 확보는 중요한 과업이었다. 이석대(이진룡), 김좌진 등이 만주지역 사령관에 임명되어 책임을 맡았고 길림, 안동, 무순, 장춘 등지에 각각의 거점이 설치, 운영되었다.

대한광복단()은 군대를 양성하여 일제를 타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따라서 무기와 자금의 확보는 중요한 과제였다. 자금모집은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산에 잠입하거나 그들이 수탈한 세금을 환수하고, 친일부호들에게 포고문을 보내 의연금을 받는 방법을 전개하였다. 김대지를 비롯한 단원들은 충남 천안의 직산금광에 잠입하여 모금활동을 했으며, 1916년 채기중은 대원 10여 명을 이끌고 강원도 영월의 중석광산에 침투하였다. 191512월 권영만, 우재룡이 경주에서 세금수송마차를 습격하여 자금을 수합하였고, 이듬해 10월 이석대(이진룡)은 평북영변에서 운산금광으로 가던 동양금광회사 소속의 현금마차를 공격하여 순사 등 7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대한광복단()은 일제의 한국 병합 자체를 강제 불법행위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그들이 수금한 세금과 광산, 회사의 이익금을 환수하는 것은 강도에게 빼앗긴 재산을 되찾는 정당한 행동이라 판단한 것이다.

같은 차원에서 대한광복단()은 식민체제에 기생하는 친일부호들을 대상으로 모금활동을 전개하였다. 1916년 한훈, 김상옥, 유장렬 등의 단원들이 전남 보성, 벌교에서 친일파 양재성, 서도현을 처단하고 헌병분견소를 습격, 무기를 수합하였다.

이듬해인 191711월 채기중이 단원 유창순, 강순필, 임세규를 이끌고 영남의 대표적 친일지주인 장승원을 처단하였다. 장승원은 조선총독이 경질될 때 아들을 조선인 대표로 동경에 파견할 만큼 친일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구황실 소유의 토지를 불법 강탈했으며, 소작인 부녀자를 구타하여 즉사시키는 등 반민족 지주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처단은 대한광복단()이 결행한 항일의열투쟁에서 가장 상징적인 의거였다. 장승원에 이어 19181월 김한종, 장두환 등 충청도지부의 단원들이 아산군 도고의 친일면장 박용하를 처단하였다.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를 중심으로 추진된 친일파 심판은 대한광복단()이 거행한 가장 대담하고도 강렬한 항일투쟁이었다. 1910년대 국내에 이러한 독립운동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무단통치하에 고통받던 우리 민족에게 큰 희망과 용기를 주었던 것이다 

대한광복단 추모탑
대한광복단 기념비
광복단略史
독립운동 영주기적비

참고 : 대한광복단기념관 (영주 풍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