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손기찬(孫基瓚)

산남의진 의병활동

용화(龍華) 2018. 3. 3.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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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칠곡출신 의병

칠곡군의 경우, 조선 말기 의병전쟁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결성된 의병부대는 없다. 1차 의병전쟁기에 이웃 고을 김천에서 창의한 김산·선산·상주의 양반 유생들이 결성한 김산의진에 참여한 칠곡 출신의 의병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그 기록을 찾을 수 없다. 2차 의병전쟁기에는 영천에서 결성된 산남의진에 참여한 장준호·장성우·손기찬(孫基瓚) 등이 칠곡 출신이다.

 

회산(回山) 장준호(張俊灝)[1888~1939]는 칠곡군 가산면 학상리 출신이다. 인동장씨 장희학 (張希鶴)의 장남으로 태어나 18세인 19064월 영천에서 결성된 산남의진(山南義陣)[1906. 4~1908. 7]에 참여하였다. 19067월에 창의장 정용기가 피체된 뒤 임용상부대(林龍相部隊)의 참모, 19074월 대장 정용기가 재기하자 상영집사(上營執事), 9월 대장 정용기가 전사한 뒤 부친 정환직이 총대장에 취임하자 장준호는 장성우·손기찬(孫基瓚) 등과 함께 인동·칠곡 지방에서 신병과 무기를 모집하였고, 재편성된 산남의진의 참모집사(參謀執事)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078월 산남의진이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의 서울진공작전(서울進功作戰)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하는 과정에서 장성우는 칠곡으로 장준호는 선산으로 파견되어 북상을 준비하였다. 190712월에 대장 정환직(鄭煥直)이 순국한 뒤 최세윤(崔世允)3대 대장으로 이끌던 산남의진은 19087월 해산하였다. 그러나 장준호는 각처를 전전하며 유격전을 감행하며 일본 군경에 저항하던 중 19092월 영천에서 체포되었다. 190911월 절도 및 폭행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108월말 합방 특사로 출옥하여 귀향하였다. 그 뒤 장준호는 각처를 전전하며 활동하던 중 19157월 대구에서 결성된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였고, 19193·1운동에 참여하여 서울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던 중 체포되어 다시 옥고를 치루었다. 1923년 봄 장준호는 만주 각처를 거쳐 밀산(蜜山)으로 갔다. 192348일 밀산 한성동(韓成洞)에 도착한 장준호는 산남의진의 동지 규당 손진구와 칠곡 출신의 장성우를 만나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하기도 하였다. 19272월 귀국한 장준호는 국내에서 신간회가 결성된 것을 보고, 같은 해 10월 밀산에서 신간회 지부를 결성하였다. 19286월 신간회 본부가 있는 서울로 돌아와 신간회에 참여하여 만주 지역 순회강연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 병을 얻어 귀향하여 1930919일 병사하였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장성우(張性愚)는 인동 출신이다. 19079월에 산남의진의 총대장 정환직이 재기하자 손기찬(孫基瓚) 등 동지 수십 인과 참여하여 장영집사(將營執事)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이 해 가을 손기찬·장준호 등과 인동 및 칠곡 지역으로 파견되어 신병과 무기를 모집하였고, 나아가 인동 및 칠곡 지역에서 탄약 제조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산남의진이 해산한 뒤 호남 지방과 영남 지방을 잠행하다가 북만주의 밀산으로 망명하여 산남의진의 동지 손진구·장준호 등과 독립운동 기지 한성동을 개척하였다. 그 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다가 귀국하여 병사하였다. 

손기찬(孫基瓚)은 인동 출신으로 19079월 산남의진의 총대장 정환직이 재기하자 장성우를 따라 동지 수십 인과 참여하였다. 손기찬은 1907년 가을 장성우·장준호 등과 인동 및 칠곡 지역으로 파견되어 신병과 무기를 모집하였고, 나아가 인동 및 칠곡 지역에서 탄약 제조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참고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2. 영남(嶺南)지방의 의병

고종 황제의 비밀조칙을 받고 시종관으로 황제 측근에 모시던 동엄(東嚴) 정환직(鄭煥直)은 그의 아들 용기(鏞基)와 함께 의논하고, 환직은 서울에서 후원하고 용기는 고향인 영천(永川)으로 내려가서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여기서 정용기는 곧 고향인 영천으로 가서 평소부터 지기지우(知己之友)이던 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과 더불어 거사 계획을 정하고, 먼저 민중들에게 알기 쉬운 국문으로 권세가(權世歌) 등의 노래를 지어 민중들에게 돌려서 애국정신을 일깨우고 고무하며, 한편으로는 통유문(通諭文격려문을 각계각층에 보내어 함께 의병에 참가하기를 권고하였으며, 한편으로는 이한구·정순기·손영각으로 본부에서 모든 일을 계획 지도하게 하고, 이규필(李圭弼백남신(白南信정완성(鄭完成최기보(崔基輔최치환(崔致煥정진학(鄭鎭鶴정대하(丁大厦이창송(李蒼松) 등으로 각 지방에 대한 연락을 맡게 한 다음, 각 지역별로 인원을 배치하여 의거 계획 진행에 대한 책임을 맡게 하였는데, 여기서 그 지방별 담당자들의 명단을 보면 아래와 같다.

 

영천 이수인(李壽寅이형표(李亨杓정치석(鄭致錫정진영(鄭鎭英) 이두규(李斗圭).
신영(新寧) 권규섭(權奎燮성낙희(成樂熙성낙호(成樂皥황보근(皇甫勤)이하수(李河秀양석용(梁錫溶).
흥해(興海) 최세한(崔世翰정내의(鄭來儀조성목(趙性穆김창수(金昌洙).
청하(淸河) 이규상(李圭相오수희(吳壽羲김찬묵(金粲黙김상규(金相奎).
기계(杞溪) 이종곤(李鍾崑김태환(金泰煥김학이(金鶴伊).
죽장(竹長) 안수원(安守元임병호(林秉浩김순도(金舜道).
영덕·영해 구한서(具漢書김태언(金太彦).
영일·장기(長鬐) 김인확·박경화(朴敬化).
진보(眞寶) 우영조(禹永祚김일언(金一彦).
청송(靑松) 서종락(徐鍾洛남석구(南錫球남석인(南錫仁임중호(林中虎) 심일지(沈一之).
영양·봉화 이세기(李世紀남석우(南錫祐).
예안·안동 김석정(金石井이경구(李景久이상호(李相浩).
비안(比安) 박태종(朴泰宗배연집(裴淵楫).
군위(軍威의흥(義興) 박광(朴匡조경옥(趙景玉).
하양(河陽경산(慶山) 정춘일(鄭春日손선일(孫善一)·손기찬(孫基瓚).
대구·현풍(玄風) 손양윤(孫亮允손양상(孫亮祥김도언(金道彦).
청도(淸道창령(昌寧) 김성극(金聖極박문선(朴文善박용운(朴龍雲).
울산(蔚山언양(彦陽) 김진현(金鎭賢최욱조(崔頊祚박기동(朴基東).
영산(靈山밀양(密陽) 박한종(朴漢宗권대진(權大震).
지례(知禮고령(高靈) 정제기(鄭晢基윤무건(尹武建).
인동(仁同칠곡(漆谷) 장성우(張性愚손영목(孫永穆).
금산(金山성주(星州) 정환문(鄭煥汶정환집(鄭煥集).
상주·선산 양제안(梁濟安손익선(孫益善).
경주 홍귀섭(洪龜燮홍우섭(洪禹燮서중표(徐中杓조상환(曹相煥).

 

그리고 19063월에 각 고을의 포수 및 민병들로 구성된 의병진이 이루어짐과 함께 의병진의 칭호를 산남(山南) 창의진(倡義陣)[산남은 영남을 말함]이라고 칭함과 동시에 진중의 부서도 아래와 같이 정하였다.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소모장 정순기
도총장(都總將) 이종곤(李鍾崑)
선봉장 홍귀섭(洪龜燮)
후봉장 서종락(徐鍾洛)
좌영장(左營將) 이경구(李景久)
우영장 김태언(金太彦)
연습장 이규필(李圭弼)
도포장(都炮將) 백남신(白南信)
좌익장 정치우(鄭致宇)
우익장 정내의(鄭來儀)
좌포장(左砲將) 이세기(李世紀)
우포장 정완성(鄭完成)
장령 집사(將營執事) 최기보(崔基輔)
군문 집사 이두규(李斗圭)5)

 

편 동해안 영해(寧海)[지금 영덕(盈德)]에서는 용감하고 날래기로 유명한 신돌석(申乭石) 장군이 또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관명(冠名)은 태호(泰浩)인데 일찍기 전기 의병 때에 19세의 소년 장군으로 영덕 의병진을 주관한 바 있었으며, 의병진이 해산된 후에는 각 지방을 찾아 의기의 인물들을 사귀어 가며 구국(救國)의 대책을 강구하여 오던 중, 을사조약이 있게 되자 다시 구국 대열에 앞장설 것을 결심하고 재산을 흩어 군사들을 모아, 19063월에 3백여 명의 군사로 영덕에서 의기(義旗)를 높이 들었는데, 군중에 호령이 분명하고 상벌이 엄정하니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환영하였다.6)따라서 신돌석 의진은 산남 창의진과 서로 호응하여 가며 점차 동해안 일대의 지역을 제압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1.벽산선생문집 권4 유사(遺事) 및 동 권1의 격고삼남각군문(擬檄告三南各郡文) 붙임 밀조(密詔).

2.신암노응규선생항일투쟁약전 산남의진유사(山南義陣遺事) 1편 약설(略說) 2.

3.산남의진유사 제3편 정용기 장군 약력 제10장 제1.

4.산남의진유사 제10장 제2.

5.의병대장신돌석장군 항일구국투쟁약 

 

참고 :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

 

3.  “山南倡義誌” 下卷 (李秉洛,李鍾基 共著)

山南倡義誌 下권 표지

                                                                  

( 하권 20 쪽 )중앙하단 張性愚,孫基燦은 自仁同으로 慕衆而歸 하고

당시 손기찬의 주소 石積面은 인동군 관할로 1914.3.1.칠곡군에 편입됨

                 

  참고 : 한국독립운동사연구 4(626,517), 산남창의지(20,129)


  4. 山南義陣歷史 (李秉洛,李鍾基 共著)                                 

山南倡義誌 下卷

 

" 孫基燦은 仁同居人이 從張性愚 入陣 하야 丁未九月에 歸鄕募衆而 還陣하고 事敗後 顚末不詳 이라 "

 (倡義誌의 저자와 내용이 같고 오른쪽 가장장리"山南倡義誌 券下 六十四" 페이지도 같아 倡義誌를 재편집한 것으로 보임)

 

참고 : 왕실도서관 디지털 아카이브

         

 5. 산남의진발상기념비문

 

구한말 국운이 쇠퇴하여 일제의 강압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영일.영천

두 고을의 접경지인 이 고장에서 당시 고종황제의 시종신이던 정환직 선생

의 주도아래 뜻있는 어른들이 궐기하여 정용기 의사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조국을 수호 하려고 의병활동을 전개했으니 이가 바로 민족의 독립사에 길

이 빛날 산남 창의진이다.

먼저 일군 수비대를 격파하고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강릉 원주를 거쳐 서

울로 진격해서 황제를 둘러싸고 있는 친일역신들을 몰아내고 이 땅에서 일본

세력들을 물리친다는 기본전략을 세우고 서기 1907년 정미 이른 봄에 기병

하니 사기는 충천해서 단숨에 청하를 습격하고 신성 자양검단에서 일군 수

비대를 연파했으나 91일 입암전투에서 패배하여 정용기 대장을 비롯하여

이한구 중군 손영각 참모 권규섭 좌영 등 요인이 순국하는 비운을 당했다.

 

이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최후의 1인 까지 최후의 1각까지 왜적을 물리

치겠다는 의사들의 충성은 불타올랐으며 정환직 선생은 노구를 무릅쓰고 다

시 진용을 정비해서 흥해 신령 의흥 등지에서 잇따라 적을 무찌르며 북상을

시도 했으나 불행이도 청하에서 피체되어 영천남교에서 순국을 했다.

 

3대 대장으로 최세한 의사를 영입하여 수적으로나 장비면에서 압도하는 적

에 대해 고산준령을 거점으로 하는 유격전으로 맛서 이리령에서 자인평야에

서 때로는 청송 영양등지에서 실로 신출귀몰의 전법으로 적을 괴롭혔으나

끝내 대세를 만회하지 못하고 최대장 마저 장기에서 피검되어 순국했다.

 

다음에는 이세기 의사가 남은 의사들을 지휘하여 산야에 피를 뿌리며

수차례 적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순국하니 회천의 큰 뜻

이루지 못한 채 이 의거는 외형상 파진되고 말았으나 해외의 망명생활에

서나 국내의 잠복전쟁에서나 끝까지 굽히지 않았던 의사들의 항일구국

정신은 그대로 후일 조국광복의 초석이 되었다.

 

평소에는 명리에 욕심 없이 산야에 묻혀 낮에는 밭 갈고 밤이면 책 읽던 고고

한 어른들이 조국이 위기를 당하자 끓어오르는 애국애정으로 승패를 초월하고

생사를 불구하고 결연히 일어서서 온갖 신산을 무릅쓰고 장열하게 싸우다

가셨으니 이 숭고한 의거의 발원지 의 한 곳 이였고 중요한 거점의 한 곳이었으며

천추의 한을 남기고 피를 뿌리든 곳인 여기 보현산 줄기 자호천의 맑

은물이 굽이치는 언덕에 정성의 돌을 세우고 임들의 드높은 넋을 기리며 길

이 애국애족의 대도를 일깨워 주는 겨레의 산 교육장이 되고자한다

 

수많은 의사들의 고귀한 이름을 다 밝혀내지 못하고 남아있는 기록에 따라

활약당시 흔히 썼던 별명 등은 보첩에 기록된 대로 바로잡아 순서를 가리지

않고 휘를 적으니

아 아 ! 방명은 이 나라 산하와 함께 무궁할 것이며 충혼의백은 겨레의 가슴속

에 영생하리라 !

     

의사휘록(義士諱錄) 

정환직 정용기 이한구 정순기 최세한 손영각 권규섭 이새기 박 구

우재룡 이경구 남석우 남석인 김성일 남승하 남석구 조상환 남서술

박동림 김진현 이형포 이규필 김성극 이두규 김진영 장성우 이규환

김태환 안영수 정래의 홍귀섭 백남신 이종곤 김용본 정치수 구한서

이규상 이사오 서종락 최기보 손호윤 홍우섭 최항조 김인호 김치현

김일언 조선유 정춘일 남석우 손영목 권대진 윤기열 김안동 심일지

김도언 박태종 김태언 정완성 박경화 남복수 박용운 최익문 최치환

우영조 오상수 박완식 윤용식 남시철 박문선 허서기 남정철 조경옥

남석광 남태석 김경문 김은집 심숭지 김두안 장지학 황보관 손수만

이태후 지용이 배석집 남규철 남문희 박기동 조용한 손기찬 손선일

손호상 김상규 오치운 김응삼 설봉문 정대하 이창송 이호인 이치옥

김석하 정진학 박갑산 조 철 최원달 하기식 유만리 김을문 김운달

강봉은 어호준 어동준 김수달 우재호 손진구 상경극 오 순 김수국

김두암 조성일 김석이 손해동 은순택 최영갑 조병극 최병국 손영술

민시식 조인식 손영석 김말출 권 광 조양식 뱍 연 권석문 강대근

박도선 김갑술 오성동 손수덕 암병철 손수봉 최정동 최영곤 최의동

김각국 최성칠 최경칠 황보봉 황보귀 최일곤 임용상 권만식 김상댁

엄순백 조창규 권상문 정한봉 정치훈 정옥기 이훈구 이순구 이용훈

김석귀 권치상 손수락 최석진 원새은 서인찬 서중포 양제안 이수인

손수기 홍재병 오수희 김찬묵 최석우 구회수 조성목 정치화 정치석

이준구 정진영 박한종 김창수 정진소 정진욱 김현극 유하실 조병수

손영준 이형윤 성락희 이능구 오두환 이형우 성락고 이하수 양석용

최용대 김남준 조병화 조성철 민영범 함영인 장준돈 김석정 고 찬

손영준 정성욱 임창규 윤복은 박기운 이종욱 이종원 조재술 안흥천

조동술 정종광 최순가 권석우 김준화 유 벅 서갑식 정만지 정운만

최정운 임시상 박연대 정환집 정석기 이석영 이원희 이효원 송 업

이창순 김병곤 김재두 권석출 김만준 서석기 정치익 장성문 박진규

정홍규 최동문 최병주 김상석

1985.11.2.

竹長中高等學校長 權泰漢 謹譔書

韓國史學會硏究委員 朴一天 監修

山南義陳 發祥紀念碑建立委員會 委員長 趙成文

總 務 李錫範

協贊 國會議員 朴敬錫 國會議員 徐鍾烈 迎日郡守 郭敬烈 竹長面長 鄭淵庚 外36

 

발상기념비 뒷면 ( 중간에; 諱 孫基燦은 瓚의 誤字 임 )

 

참고 : 산남의진 발상기념비

 

칠곡지역의 의병활동과 광복단활동으로 이어지는 조부님 손기찬(孫基) 연계된 이력과 활동정황을 관련기관의 검토를 거쳐 同音異字誤記된 산남의진 義兵史의 孫基燦을손기찬(孫基瓚)으로 바로 잡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