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 39명 대한민국 국적 취득
- 허위·최재형‧박찬익‧권재학·오성묵·이인섭 선생 후손 등 -
□ 법무부(장관 박상기)는 2019. 2. 27.(수) 10:30 법무부 대회의실에서 일제 강점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기 위해 국내‧외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한
허위, 최재형 선생 등 독립유공자 19명의 후손 39명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국적 증서 수여식을 개최하였습니다.
* 러시아 18명, 중국 13명, 우즈베키스탄 3명, 투르크메니스탄 2명, 카자흐스탄 2명, 쿠바 1 명
□ 특히 이번 수여식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들의 숭고한 희생에 보답하고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마련되었습니다.
○ 금번 수여식에 참석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국가보훈처와 함께 역사박물관 등 역사현장을 탐방하고 3·1절 기념식에도 참석할 예정입니다.
※ 2006년 이래 13회에 걸쳐 총 326명의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국적증서 수여
□ 이번에 대한민국 국적증서를 수여받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국적법 제7조에 따라 그 직계존속이 독립유공으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정부로부터 훈장·포장을 받은 사실로 인해 특별귀화허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 최발렌틴 러시아 독립유공자후손협회장은 “할아버지(최재형 선생)께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러시아 거주 동포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과 대한민국이 조국의 침입자로부터 해방되는 것’이었으며, 이 두 가지가 모두 실현되어 가슴 뿌듯합니다.
독립유공자 후손으로 국적을 취득하게 되어 영광스럽고, 저의 명예를 걸고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 가겠다”고 소감을 밝혔습니다.
□ 박상기 법무부장관은 이 날 행사에서,
○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국적증서 수여식을 개최하게 된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면서
○ “오늘 날 대한민국의 발전과 번영은 선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강조하고
○ “나라를 위해 희생한 독립유공자를 앞으로도 계속 발굴하여 그 후손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되찾아 국내에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하였습니다.
□ 독립유공자 후손 소감문
【 최재형 선생 후손 최발렌틴 】
친애하는 동포 및 친구 여러분, 오늘은 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날이 될 것입니다. 저는 이제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습니다.
나의 할아버지 최재형은 인생에 두 가지 큰 목표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는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조국의 침입자로부터 대한민국이 해방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러시아에 살고 있는 동포들 중에는 학자, 영웅, 정치인, 발쇼이 극장의 연주가, 유명한 운동선수 그리고 여러 세대 젊은이들의 우상인 록가수까지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은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우리 선조들과 할아버지가 목숨 바쳐 이루고자 했던 꿈이 모두 실현되었습니다. 조국 독립을 위해 투쟁하신 할아버지 최재형의 업적 덕분에 제가 대한민국의 국적을 취득하게 되어 너무나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의 명예를 걸고 언제나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을 맹세합니다.
【 이여송 선생 후손 이천민 】
저는 독립운동 유공자 이여송 장군의 차손으로서 이번에 대한민국 국적을 받게 된 이천민입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법무부, 국가보훈처 등을 비롯해 여러분들의 정성과 노고 덕분으로 대한민국의 성원이 되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수고와 도움에 충심으로 사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오늘 수여식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은 순간부터 대한민국 국민이 된다는 자부심에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대한민국은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진 자랑스러운 나라입니다. 한민족은 근면하고 문명하고 슬기롭고 지혜로운 민족입니다. 이러한 나라와 민족의 구성원이 된다는 사실이 어찌 자랑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나온 역사를 더듬어 보면 한 많은 치욕의 역사도 없지 않았습니다. 일제 강점시기 선조들께서는 고향과 나라를 등지고 압록강 건너 만주 벌판에서 말할 수 없는 고생과 치욕을 겪었습니다. 저의 할아버지께서는 민족의 자주 독립과 나라를 되찾고자 장백 밀림 속에서 일제와 칼날을 맞대고 총탄을 겨누어 가며 현전에 나서서 28세의 아까운 나이에 순난하셨습니다. 이러한 애국 장령들의 소원이 바로 오늘날의 민주와 자유, 평등의 대한민국이 아니겠습니까. 그 후손인 우리들은 당당하게 대한민국의 일성원이 되어야겠습니다. 자신의 열정과 능력을 작게나마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써야 하겠습니다.사람사람이 모여 가정이 되고, 집집이 모여 부락이 되고, 도시 도시가 모여 나라가 됩니다. 저와 저의 가정이 대한민국의 일성원, 일가족이 되어 이제 나라에 바칠 젊음은 없지만 낙엽귀근이라고 나라를 되찾은 오늘부터 조국 통일의 대업, 나라의 안정, 문화 향상과 경제 발전에 남은 일신을 바치고 열을 빛내겠습니다. 유감없는 한 줄기의 석양빛이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이인섭 선생 후손 이펠릭스 】
제 할아버지이신 이인섭은 1888년9월14일에 평양에서 태어나셨습니다.1908년2월에 할아버지는 김광수 의진에 참여하여 1911년까지 비서로 일하면서 운동이 일어났던 지역 구석구석에 왕래하셨습니다.1910년 경술국치 이후 할아버지가 의병들과 같이 중국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셨고 자유로운 대한민국에 대한 꿈을 가슴깊이 품어 러시아, 카자흐스탄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에서 일을 하셨습니다. 제 할아버지와 독립을 위해 애쓰신 분들을 잊지 않고 그분들의 공로에 대해 호평을 해주시고 무엇보다 할아버지의 꿈이 이루어져 대한민국이 자유로운 국가가 된 점에 대하여 대한민국 국민들과 정부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독립운동 100주년이 된 오늘 같은 뜻깊은 날에 이인섭의 후손인 저와 제 자식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이 될 수 있는 점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감사드립니다.앞으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나라에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 오성묵 선생 후손 김이고리 】
저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서 피터 알렉산드로비치 오성묵으로 알려진 오성묵선생의 손자입니다. 저의 외할아버지는 1905년 18세의 나이로 한국과 인접한 만주에서 일본 점령군에 맞서 무장 투장을 시작하셨습니다. 1916년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된 이후, 만주에서 러시아로 이주하여야 했고 거기서 항일 투쟁을 계속이어 나갔습니다. 극동지역에서 소련연방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는 극동지방에서 한국인을 위한 조직활동에 참여하셨고 한국어로 된 간행물을 1936년까지 발행하셨습니다. 그 해 카자흐스탄으로 추방되었고 2년 후 1938년 총살당했습니다. 제 할아버지 가족은 추방, 체포, 사형집행까지 제2차 세계대전 중 큰 고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사후 1956년이 되어서야 할아버지의 행적이 재조명되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가 대한민국 독립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을 의심하지 않았고 지금은 조국을 위한 그의 용기와 탁월한 조직능력, 활동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노력하신 할아버지의 업적에 대한 노고를 치하하여 저에게 한국국적을 부여해주신 것에 대해 몹시도 큰 영광으로 생각됩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권재학 선생 후손 김넬랴 】
오늘 저는 권재학 애국지사님 후손으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권재학 애국지사의 아들인 저의 외할아버지는 일제시대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을 당해 저희는 3대째 러시아에서 살고 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고향에 다시 돌아가기를 학수고대하며 열심히 탄광에서 일하시면서 한국에 계시는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눈물도 많이 흘리셨습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습니다. 너무나 가슴 아팠습니다. 발전된 조국을 보시면 하늘에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생각합니다. 저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 하게 되어 매우 기쁘고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법을 잘 지키고 떳떳한 국민으로 조국 발전에 기여하며 살고 싶습니다. 다시 한번 대한민국 정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독립유공자 공적개요 및 후손 명단
독립유공자 | 특별귀화 대상 후손 | ||||
성 명 | 훈 격 | 공적 개요 | 국 적 | 성 명 | 관 계 |
허 위 (1854 ~ 1908) | 대한민국장 (’62) | - 1895년 명성왕후 시해와 단발령 반포에 반발하여 재야유생들을 규합, 항일 의병 참모장으로 활동 -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 후, 전국 각지를 돌며 의병을 조직 - 1907년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연천 등지에서 의병을 구성하여 일본군과 전투하고 부일 인사 처단 - 1907. 11월 이인영 등 전국 각지 의병장들과 함께 13도 연합의병부대를 구성하고, 군사장에 임명되어 1908. 1월 서울진공 작전을 펼치며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음 - 이후 휘하에 의병장들과 각기 부대를 나누어 유격전을 벌여 일본군을 연파, 1908. 6. 11. 일제에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 1908. 9. 27.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 (서대문형무소 사형수 1호) | 카자 흐스탄 | 정○○○ (27세, 여) | 외현손 |
최재형 (1860 ~ 1920)
| 독립장 (’62) | - 1904년 러시아 연해주 노우키에프스크에서 ‘동의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교포들의 단결과 애국심 고취 및 무장독립투쟁 전개 - 1908년 의병을 이끌고 함경북도 일대의 일군 수비대와 전투, 1909년 안중근 등과 단지동맹 결성 - 1910년 7월 ‘대동공보’를 재간하여 동포들의 항일독립정신 고취 -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신규식·이동년 등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을 논의, 의정원회의에서 초대 재무총장으로 선출 - 1919년 11월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그 단장이 되어 무장독립투쟁을 전개하다가 1920년 4월 일군에 체포되어 총살 순국함 | 러시아 | 최○○○ (81세, 남) | 손 |
최○○○ (35세, 남) | 증손 | ||||
박찬익 (1884 ~ 1949) | 독립장 (’63) | - 1910년 한일합방되자 북만주로 망명한 후 대종교에 투신하여 교육사업에 주력 - 1912년 대한독립의용군 조직,이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21년 7월 외무부 외사국장 겸 외무차장대리를 지냄 - 중경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활동 | 중국 | 신○○ (74세, 여) | 외손 |
노○○ (56세, 남) | 외증손 | ||||
노○○ (51세, 남) | 외증손 | ||||
신○○ (46세, 여) | 외증손 | ||||
전일 (1893 ~ 1938) | 독립장 (’07) | - 1915년 5월 간도지방에서 이동휘와 함께 독립운동에 힘쓰다 같은 달 블라디보스톡으로 도항하여, 1918년 4월 한인사회당 창립에 동참 1919년 4월 이동휘를 도와 군자금 모집에 노력하였으며, 같은 해 12월부터 1920년 3월까지 대한국민의회 서기를 지냄 1920년 3월 블라디보스톡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중앙총회에서 선전부장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달 신한촌에서 항일사상과 사회주의를 일본군대에 선전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아 옥고 중 탈옥을 기도하다 4년의 가형을 받음 1929년 7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 같은 해 11월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활동 중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음 | 투르크 메니스탄 | 강○○○ (55세, 남) | 외손 |
강○○○ (23세, 남) | 외증손 | ||||
김남극 (1868 ~ 1920) | 애국장 (’91) | 중국 길림성 혼춘현 대황구에서 독립운동단체의 지휘관으로 독립군을 통솔하던 중 1920년 10월 17일 일군에게 체포되어 대황구에서 사살당해 순국함 | 중국 | 김○○ (38세, 남) | 현손 |
최명수 (1881 ~ 1951) | 애국장 (’91) | 1910년 일제에 한국이 강점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김동삼과 함께 경학사와 부민단을 조직하여 재만한인의 경제적 지위 향상에 노력하는 한편 독립운동기지의 건설에 참여함 1919년 한족회에 참가하여 헌병과장, 검무감 등으로 친일분자 처단에 앞장섰으며, 서로군정서의 중앙의회 의장직을 역임함 1922년 대한통의부 검무국장에 선임되어 활약하였으며, 1924년 길림주민회 대표로서 정의부 조직에 참가하였으며 정의부가 조직된 후에는 검무감에 임명되어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함 1928년 국민부 간부에 임명되어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고, 상해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 2월 일본영사관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어 1935년 6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 | 중국 | 강○○ (41세, 여) | 외증손 |
이여송 (미상 ~ 1936) | 애국장 (’95) | - 1930년대 조선혁명군에 가담하여 제1사 부관으로 무기 구입을 담당 - 1936년 2월 3일 제1중대 부관으로서 만주 집안현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전사 순국함 | 중국 | 이○○○ (64세, 남) | 손 |
이인섭 (1888 ~ 미상) | 애국장 (’06) | - 1907년 2월부터 1911년 10월까지 평남 맹산군 일대에서 김관수의진에 참가하여 의병부대장의 서기로 활동 - 1910년 7월 홍남구와 함께 만주 일대에서 ‘국민회’ 지방회를 설립 - 1913년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이주, 1915년 블라디보스톡에서 한인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 - 1918년 4월 하바로프스크에서 개최된 한인사회당 제1차 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위원이 됨 - 1919년 12월 韓·中·蒙·日 혁명위원회 위원 역임, 1921년 11월부터 1923년 12월까지 이만 한인유격대 정치위원 등으로 활동함 | 우즈베 키스탄 | 이○○○ (44세, 남) | 손 |
이○○ (15세, 남) | 증손 | ||||
이○○○ (11세, 여) | 증손 | ||||
이근수 (1891 ~ 1924) | 애국장 (’07) | - 1911년 중국 서간도로 이주한 후 봉천성 유하현 마호구 한인학교에서 한문교사로 활동하며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함 - 1919년 10월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으로부터 조선특별파견원으로 임명되어 국내에 들어와 - 1920년 3월 평양에서 강성리를 만나 군자금 모집과 함께 정찬도, 백기환 등과 모험청년단을 조직하여 주요 시설물 폭파를 준비하는 활동을 전개함 - 1920년 5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 중 1924년 5월 8일 순국함 | 중국 | 이○○ (45세, 여) | 증손 |
오성묵 (1886 ∼ 1938) | 애국장 (’09) | - 길림 도립중학을 졸업한 후 북간도에서 청년단체를 조직하여 계몽운동에 종사, 1913년 간민회 결성에 참여 - 1915년 중국당국의 박해를 피해 러시아로 이주 후, 1924년 블라디보스톡에서 3·1운동 기념식 주도 - 1937년 하바로프스크 극동국립출판사 조선부장으로 재임 중 스탈린의 대숙청 당시 처형 ※ 1956년 12월 8일 복권 | 러시아 | 김○○○ (59세, 남) | 외손 |
이경재 (1875 ~ 1920) | 애국장 (’09) | -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군에 가담하여 의군단(義軍團) 참모 겸 비서로 활동 - 청산리전투에서 패전한 일본군이 독립군부대를 추격하기 위해 의란구로 들어왔을 때 의군단이 다른 독립군부대와의 연합작전을 위해 이동하면서 남겨두고 간 총기와 문서를 보관하는 책무를 맡음 - 1920년 11월 마을을 수색하던 일군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피살 순국함 | 중국 | 이○○ (35세, 여) | 외증손 |
권재학 (1879 ~ 1938) | 애족장 (’90) | - 1919. 4. 1. 충북 음성 소이면 한천장날을 이용하여 김을경, 이중곤 등과 독립만세운동 주도 - 수백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로 달려가 면장 민병식에게 같은 민족으로서 독립만세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 - 독립만세를 절규 고창하던 중 김을경과 이중곤이 경찰주재소로 체포되어 가자 격분하여 주재소의 장지문을 발로 걷어차며 석방을 요구하다 체포됨 - 1919년 10월 2일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름 | 러시아 | 김○○ (36세, 여) | 외증손 |
석○○ (15세, 여) | 외현손 | ||||
석○○ (3세, 여) | 외현손 | ||||
김○○○ (33세, 여) | 외증손 | ||||
이○○○ (6세, 남) | 외현손 | ||||
이○○○ (2세, 여) | 외현손 | ||||
이○○○ (17세, 남) | 외현손 | ||||
이○○○ (12세, 여) | 외현손 | ||||
남인상 (1868 ~ 1951) | 애족장 (’96) | 기독교 장로로 1905년 만주로 망명하여 1910년 연길현 와룡동에 학교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을 실시 - 1919. 3. 13. 간도지역에 있던 민족지도자들이 용정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여, 선생은 재남북만주 조선민족대표 17인 중 1인으로 '조선독립선언서 포고문'을 발표하는 한편 3·13 시위운동 시 김약연·구춘선 등과 함께 활동 1919년 북간도지역의 대표적인 민족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의 성원으로 활동하였고, 1920년 일본군의 간도출병시에는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에 심혈을 기울임 - 광복후 기독교 대표로 연변 제1차 임시참의원을 지냈음 | 중국 | 남○○ (4세, 여) | 현손 |
박택룡 (1905 ~ 1948) | 애족장 (’03) | - 1930년 5월 최용철과 함께 중국 길림성 연길현 상의향에서 독립군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 1930년 10월 소위 강도죄로 징역 3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름 | 중국 | 윤○○ (51세, 남) | 외손 |
구철성 (1892 ~ 1937) | 건국포장 (’06) | - 1920년 3월 북로군정서에 가입하고 군자금 모집 등 활동 - 1920년 말 대한의용군에 편제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려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으로 고초를 겪음 - 레닌그라드에 있는 국제군사학교 졸업 후 1929년 러시아령 연추에서 보병 중위로 항일전에 참여함 - 1937년 일본 경찰에 정보를 넘겼다는 혐의로 러시아 합동국가보안부에 체포되어 총살형을 선고받고 순국 ※ 1957. 9월 복권 | 러시아 | 환○○ (45세, 여) | 외증손 |
환○○ (3세, 여) | 외현손 | ||||
환○○ (3세, 여) | 외현손 | ||||
피○○○ (39세, 여) | 외증손 | ||||
피○○○ (14세, 여) | 외현손 | ||||
피○○○ (9세, 여) | 외현손 | ||||
피○○○ (8세, 여) | 외현손 | ||||
한이군 (1897 ~ 1938) | 대통령 표창 (’96) | 1919. 4. 8. 경북 고령군 우곡면 대곡동에서 박기노의 선창에 따라 동민 50여 명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다 피체되어 옥고를 치름 | 중국 | 이○○○ (32세, 남) | 외증손 |
이승준 (1882 ~ 1947) | 대통령 표창 (’11) | - 1924년경부터 1934년까지 쿠바 에서 대한인국민회 마딴사스 지방회 구제원으로 활동 - 1928년에는 한인동포 국어교육 운동을 전개 1930년 광주학생운동을 원조 - 1931년경부터 1945년에 이르기 까지 독립금 약 44원 58전을 지원 | 쿠바 | 산○○○ (35세, 남) | 증손 |
김규석 (1880 ~ 1941) | 대통령 표창 (’11) | - 1919. 4. 3.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청장년 33명으로 구성된 비밀결사 ‘이팔사’에 참여 - 순천 벌교 장날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1919. 4. 9. 이팔사 대원들과 장좌리 아랫 시장에 모여 '대한독립기'를 높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다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 중국 | 김○○ (10세, 남) | 현손 |
□ 독립유공자 후손 국적취득 현황 (2018년 말 기준, 단위 : 명)
연도 합계 | 2006 | 2007 | 2008 | 2009 | 2010 | 2011 | 2012 | 2013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1,118 | 163 | 122 | 157 | 120 | 111 | 89 | 75 | 40 | 51 | 38 | 66 | 40 | 46 |
참고 : 법무부 보도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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