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손기찬(孫基瓚)

의병 계열의 비밀결사운동

용화(龍華) 2018. 11. 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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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계열의 비밀결사운동

1910년대 국내에서는 주로 비밀결사를 통한 독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 국내 비밀결사는 크게 의병 계열과 자강운동 계열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의병 계열 비밀결사로는 대한독립의군부, 풍기광복단, 민단조합, 대한광복회 등이 있었다.

의병 계열 비밀결사 중 대표적인 것은 ‘대한독립의군부’로, 1912년 한말 의병장 임병찬에 의해 조직되었다. 임병찬은 1906년 면암 최익현을 의병장으로 봉대하고 정읍 무성서원에서 창의했으나 곧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다. 1907년 1월 귀국한 그는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고, 1908년 두 차례에 걸쳐 헌병대에 구속되어 조사를 받았으며, 1910년 병합 후에는 은사금을 거부했다. 그는 1912년 공주 유생 이식이 전해온 고종의 밀칙을 받고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했다. 참여자는 김창식 · 이기영 · 강봉주 · 이용철 · 정철화 · 조중구 · 김현각 · 유병심 · 윤효 · 신규선 · 윤이병 등이었다.

독립의군부 조직은 1914년 5월 군자금을 모금하던 김창식 등이 체포되면서 드러났다. 임병찬은 조직이 드러나자 데라우치 총독과 일본 내각총리대신에게 면담을 요구하는 투서를 보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체포되었다. 임병찬은 체포된 뒤 계획이 좌절된 것에 분개하여 3차례 자결을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1914년 6월 거문도에 유배되어 1916년 5월에 병으로 서거했다.

대한독립의군부 사건 관련자는 모두 54명이었다. 당시 경찰은 이 가운데 왕산 허위의 일족, 부하 또는 교유가 가장 많다고 파악했다. 실제로 허위의 사위인 이기영, 비서인 이기상 형제가 참여했고, 허위 부대의 참모를 지낸 여영조, 허위의 부하인 정철화도 참여하고 있었다.

‘풍기광복단’은 1913년 풍기에 거주하던 채기중의 주도하에 전원식 · 정성산 등 10여 명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이들은 전국의 의병 출신 인사들을 단원으로 ‘혁명기관’을 조직해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실제로 채기중은 홍주 의병에 참여했던 양제안을 영입했다. 이강년 의병부대에 참여했던 강순필 · 정진화, 홍주 의병에 참여했던 유창순 · 한훈 등도 합류했다. 채기중은 경북 함창 출신으로 직접 의병에 참여하지는 않았던 양반 유생이다.

풍기광복단의 일차 목표는 만주의 독립군 양성을 후원할 군자금 마련이었다. 양제안은 1913년 만주에 들어가 상황을 둘러보았고, 채기중은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금을 시작했다. 풍기광복단은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의 일부 인사들과 함께 1915년 7월 ‘대한광복회’를 만들게 된다.

‘민단조합’은 1914년 경북 문경에서 국권회복을 목표로 결성된 비밀결사로, 주도한 이들은 의병대장 이강년 휘하의 이동하를 비롯하여 이강년의 조카 이식재, 이강년의 군사장 최욱영, 순국의사 김순흠의 아들 김낙문 등이었다. 또 민단조합에 참여한 이들 가운데 강봉주 · 이은영은 1912년 결성된 대한독립의군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처럼 민단조합에 참여한 이들은 대부분 의병 출신이었으며, 소백산맥 남쪽 낙동강 연변의 예천 · 문경 · 상주 일원의 양반 출신들이 많았다.

이동하는 1914년 9월 민단조합을 결성하고, 1915년 경성에서 이은영 · 이무영 · 이종황 · 권영직 등을 동지로 규합한 뒤 자금 조달에 나섰다. 그는 먼저 권영직을 경남 밀양에 파견해 박인근 · 김강년 · 유영봉을 경성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이들에게 의군부 참위와 참령의 발령장을 주었다. 이들은 밀양으로 돌아가 1916년 군자금을 모아 경성으로 오다가 체포되었으나, 이동 중 도주에 성공했다.

이식재는 1914년 최욱영 · 강병수와 함께 충북 제천 근북면사무소를 습격하여 100원을 강탈했다. 1918년 1월 이동하 · 이은영 · 김낙문 · 이식재 · 최욱영 등은 충북 제천경찰서에 검거되어 보안법 위반 및 강도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민단조합은 대한독립의군부, 풍기광복단 등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군자금 모금을 통해 만주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지원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대한광복회’는 1915년 풍기광복단과 대구의 조선국권회복단 일부 인사가 결합하여 결성한 단체이다. 주도한 이는 박상진으로, 경남 울산에서 태어나 경북 경주군 외동면에서 성장했다. 그는 결혼 이후 박규진을 따라 경북 청송군 진보면 홍구로 들어갔다. 그곳은 천혜의 요새로 은거에 적합했다. 이미 그곳에는 1894년 선산 임은에서 옮겨온 유학자 방산 허훈, 왕산 허위, 성산 허겸 3형제가 살고 있었다.

1899년 박상진은 왕산 허위의 문하에 들어갔다. 이때 박상진은 허위를 통해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유생들을 만나게 되었다. 1899년 고종이 허위의 명성을 듣고 그를 원구단 참봉으로 제수하자 허위는 상경했다. 박상진도 1902년 상경하여 허위 문하에서 정치와 병학을 수학했다. 그는 1905년 2월 개교한 양정의숙 전문부 법률과에 입학해 1908년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이때 안희제도 그와 함께 양정의숙을 졸업했다.

1907년 허위가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했을 때 박상진은 아직 학생이었기 때문에 의병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는 등 의병 활동을 지원했다. 1908년 허위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했을 때 가족을 대신해 시신을 인도받은 것도 박상진이었다.

1908년 박상진은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교남교육회에 참여했다. 같은 해 9월 조직된 달성친목회에도 회원으로 참여했다. 그는 1910년과 1911년 다시 만주와 연해주를 둘러보고, 서간도의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지원하기로 작정했다. 1911년 연말 박상진은 상하이 등지를 여행한 뒤 귀국했다. 이때 그는 신해혁명을 목격하고 국권회복 방법으로 폭동, 암살 등의 방략을 생각하게 된다. 이후 박상진은 대구에서 곡물상 상덕태상회, 포목무역상을 설립하기도 했다.

이즈음 박상진은 대한독립의군부에 참여하고 조선국권회복단에도 발을 들였다. 그는 이들 조직을 기반으로 1915년 7월 풍기광복단을 이끌던 채기중과 손잡고 대한광복회를 결성했다. 박상진 · 채기중 외 대한광복회 회원들을 살펴보면, 영주의 유생 임세규(장승원, 박용하 처단)와 권국필, 칠곡의 손기찬, 예천의 조용필(이강년 의병대 참여) · 윤창하 · 정진화, 영주의 조재하, 문경의 강병수, 안동의 이종영, 고령의 김재열, 영천의 정재목, 영양의 권영만(진보 의병대), 창녕의 우재룡(산남 의병대), 밀양의 손일민 등이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양반 유생이었다.

한편 대한광복회는 충청도와 황해도로 조직을 넓혔다. 충청도의 예산 · 천안 · 괴산 · 청양 등지와 황해도의 송화 · 해주에서 회원을 확보했다. 그 결과 대한광복회 회원은 경상도 17명, 충청도 20명, 황해도 6명, 기타 6명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의병 계열 인사가 주축이 되고 자강운동 계열 인사도 일부 참여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 모집, 무관과 군인으로 된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조직의 설치, 친일 부호 처단 등을 목표로 활동했다. 활동 거점은 대구의 상덕태상회, 영주의 대동상점, 예산 · 연기 · 인천 등의 미곡상, 만주 안동의 삼달양행, 장춘의 상원양행 등이었다. 대한광복회는 100개소의 곡물상과 잡화상을 설치해 상업으로 활동을 위장하고자 했으며, 특히 곡물상을 주요 근거지로 만들려 했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이 가장 시급하다고 보고, 우선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그러나 1916년 음력 8월 대구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 발각되어 박상진 외 9명이 체포되었다. 다행히 대한광복회의 조직 전모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9명이 모두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박상진은 6개월의 징역을 언도받았다. 다른 이들은 징역 12년부터 4개월까지 언도받았다.

1917년 출옥한 박상진은 다시 경상북도 각처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금하기로 하고 부호들의 명단을 파악했다. 그리고 자산가들이 군자금 모금에 응하도록 하기 위해 먼저 그동안 비협조적이던 부호들 몇 명을 암살하기로 했다. 그에 따라 채기중 · 강순필 · 유창순은 1917년 11월 장승원을 처단했다. 장승원은 한말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칠곡의 부호로서, 두 차례에 걸쳐 군자금 모금을 거부한 인물이었다.

이어서 1918년 1월 김한종과 장두환은 악명이 높은 도고면장 박용하를 처단했다. 박용하 사건 이후 천안군 성환에서 장두환이 체포되고 예산에서 김경태 · 임봉주 등이 체포됨으로써 광복회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고 말았다. 박상진은 노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대한광복회는 비밀리에 풍기에 혁명기관을 설립하고 전국 의병 참여자들을 모아 대사를 도모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혁명기관’이라고 한 것을 보면, 신해혁명의 영향을 받아 왕조 재건이 아닌 새로운 공화주의국가를 지향했던 것 같다. 박상진 · 김한종 등은 체포된 뒤에 경찰 신문에서 대한광복회의 목적이 “국권을 회복하여 공화정을 실현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대한광복회는 또 전라도에 보낸 통문에서 “민국을 건설하자면 국왕이 없는 기회를 이용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한광복회는 1910년대 국내 비밀결사운동 가운데 가장 조직이 크고 활동도 활발했으며 공화주의를 지향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된다.

 

참고 :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