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관련

2022년 11월의 독립운동가 박건병,강경선,배천택 선생 선정

용화(龍華) 2022. 11. 1.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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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독립당 촉성운동을 주도한 박건병(朴健秉 ,1892 ~1932.01.10 . )

1892년생인 박건병은 강원도 김화군 김화면(金化面) 읍내리(邑內里) 673번지가 본적이다. 아호는 맹천(孟泉)이다. 미주지역 독립운동계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교통총장을 역임한 박용만(朴容萬)의 5촌 조카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28세 되던 1919년 5월 서울에서 결성된 대한독립애국단에서 첫 행적을 확인할 수 있다. 임시정부의 지원단체인 대한독립애국단에서 파견한 김상덕(金相德)이 철원군 동송면(東松面)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지역의 교육계와 기독교계 사람을 만나 애국단 소속 강원도 철원군단(鐵源群團, 일명 철원애국단)을 조직하자 참가하였다. 이후 철원군단이 애국단의 강원도 조직을 관리하는 강원도단으로 위상이 높아졌고 그때 학무국장을 맡았다. 강원도단은 임시정부를 선전하고 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벌였다. 임시정부 파견원인 신상완(申尙玩)과 같이 철원면 사요리(四要里) 소시장에서 임시정부를 축하하는 연설회를 열고 만세시위를 주도할 때 표면에 나선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약했고, 그 직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0년 1월 20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 때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2개월 정도 활동하다 베이징으로 갔다. 8월에 외교를 중심으로 한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판하며 무장투쟁을 주장하던 베이징군사통일촉성회가 결성되자 합류하였다. 이듬해 4월 베이징에서 군사통일회의가 열리자 참가하여 의안심사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회의에서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불승인하는 안건이 제출되자 찬성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요구하였다.

군사통일회의측의 요구로 촉발된 국민대표회의 소집 여론은 1923년 1월 현실화하였다. 회의는 5월까지 지속되었다. 회의 기간 동안 김갑(金甲)과 함께 베이징 대표로 참석하여 ‘선서 및 선언서’를 작성할 3인의 기초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개조파와 창조파 등으로 나뉘어 의견을 대립할 때 창조파를 대표하여 임시정부는 정부가 아니라며 임시정부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단체의 크고 작음을 불문하고 모두 무효로 간주하고 새로운 기관을 조직하자고 주장하였다. 외교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혈정주의’를 내세우며 폭력적 방법으로 투쟁을 전개하자고도 주장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후 창조파를 대표하는 한 사람으로 1924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국민위원회에 참가하여 집행위원 비서로 선출되었다. 소련은 일본과의 긴장관계를 원하지 않는 데다 정식 외교 관계를 수립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국민위원회의 신정부 구상을 지지하지 않았다. 국민위원회는 신정부를 세우는 대신 정당을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1924년 8월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 결성에 참가하였다. 북경한교동지회는 1925년 3월 1일자로 기관지 『도보(導報)』(조선어 : 『앞잡이』)를 창간하였다. 잡지를 순간(旬刊) 또는 월간으로 발행하여 노령, 서간도, 길림, 일본, 국내 등지에 보냈다. 무장투쟁을 수단으로 절대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대독립당을 결성해야 하며 일제와 타협하는 자치운동도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잡지를 통해 국내외에 알리는데 노력하였다. 그도 이를 뒷받침하고자 창간호에 <혁명운동상 조직의 여하>라는 글을 게재하였다. 이듬 해 7월 이후 관내지역에서 대독립당 촉성운동이 시작되자 북경촉성회 결성에 참가하여 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활약하였다. 1927년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 결성에 참여하여 15인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1928년 5월 만주에서 전민족유일당 조직 촉성회가 열렸을 때 베이징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후 베이징으로 돌아가지 않고 연길현(延吉縣) 동향수하자(東珦水河子)에 있는 계림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32년 1월 10일 동네를 침입한 강도에게 피살당하였다. 한창 활약할 나이인 41세에 안타까운 죽음을 맞은 것이다.

대한민국정부는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박건병 사망 기사(동아일보 1932년 1월 31일자)ⓒ국사편찬위원회

다양한 방면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한 강경선( 康景善 ,1891.08.15 ~1930.08.18 . )

1891년 8월 15일 평북 정주군(定州郡) 대전면(大田面) 운전리(雲田里)에서 태어난 강경선은 아호가 극재(克齋), 이명이 원경(元景, 元卿)이었다.

1920년 12월 상하이에서 여운형(呂運亨)이 조직한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의 간사로 활약하였다. 이후 재건된 대한적십자회에서 1921년 11월 상의원(常議員)에 선출되었고, 상해한인구락부 창립에 관여하여 사교부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선우섭(鮮于涉)과 같이 요녕성(遼寧省) 안동현(安東縣)에 있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을 거점으로 국내에서 획득된 정보를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연락과 정보 수집 및 전달에 관여하였다.

1923년 1월부터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태극단(太極團)의 대표로 참가하여 개조파 입장에서 활동하였다. 회의가 결렬된 이후에도 상하이에서 상해대한교민단(上海大韓僑民團) 의원으로 활동하며 인성학교(仁成學校) 유지에 노력하다 1926년 교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6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평안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5년 3월 여러 의원과 함께 임시의정원에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결의안>을 상정하여 18일 이승만을 탄핵하고 면직시키는데 앞장섰다. 임시의정원은 면직과 동시에 박은식(朴殷植)을 신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1926년 7월 임시정부가 재정에 어려움을 겪자 안창호 등과 함께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만들어 지원하고자 하였다. 국내에서 6.10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상하이의 삼일당에서 연설회를 조직하고 운동의 경과를 보고하였다. 때마침 안창호가 제창한 대독립당 촉성운동에 호응 하면서 6.10만세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민족적 통일기관을 세우자고도 주장하였다. 자신의 주장을 실천에 옮기고자 1927년 임시정부의 홍진(洪鎭)과 사회주의운동 계열의 홍남표(洪南杓) 등 4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개인은 단체를, 단체는 유일당을 하루라도 빨리 완성하도록 하자’고 주창하며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를 결성할 때 25명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난징에서 활동하다 1930년 8월 18일 피살되었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유일독립당 상해 촉성회 선언서

대독립당 결성운동과 무장투쟁 준비에 노력한 배천택( 裵天澤 ,1892 ~미상 )

1892년 경북 대구 견(堅) 254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이 성산(星山)이며, 본명은 배병현(裵炳鉉)이고, 독립운동하며 배달무(裵達武)라는 다른 이름도 사용하였다. 석정(石亭)이란 별호가 있다.

경북 성주(星州)에서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여 1907년 5월 1냥(兩)을 의연금으로 납부하였다. 1909년 김동삼(金東三) 등과 대동청년당(大同靑年黨)을 조직하였다. 1911년 조선총독부가 운영하는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傳習所) 응용화학과에 입학하여 이듬해 12월 졸업하였다. 이때의 명부에 배병현이라고 나온다. 1916년 중국 북경공업대학에 입학했다가 중퇴했고, 청 말 쿤밍(昆明)에 세워진 군사학교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을 1919년에 졸업했다는 말이 있다.

1919년 랴오닝성(遼寧省) 류허현(柳河縣)에 있는 군정부(軍政府)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로 개편될 때 동참했으며, 1920년 9월 박용만이 주도하는 북경군사통일촉성회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1921년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을 성토하며 11월 박용만이 주도한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의 군무총장에 선임되었다.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의 3인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하여 비서장(秘書長)에 선출되었다. 군사분과 위원으로 활약하며 개조파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이후 베이징으로 가서 활동하다 1924년 1월 친일분자와 밀정, 부정행위자 등 독립운동에 방해되는 요소들을 파악하기 위해 결성된 한교구락부에 참여하여 조사위원, 선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8월에는 창조파 인사를 중심으로 북경한교동지회가 결성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실행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창조파의 기관지로 1925년 1월 창간된 『도보(導報)』(조선어 : 『앞잡이』)의 발행에도 한진산(韓震山)과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절대 독립과 무장투쟁 그리고 대독립당 결성을 주장하였다. 음력 1월 대구에서 온 이정기(李定基)를 접견하고 폭탄제조법을 가르쳐주었다. 이후 귀국한 이정기가 암살단을 조직한 사실을 1926년 7월 이육사(李陸史, 본명 李源祿)에게서 보고 받았다. 1925년 4월 도보사의 사무실에서 밀정 등을 처단하는 비밀결사로 다물단(多勿團)을 결성했고, 5월 조직의 이름으로 <악분자 소탕선언(惡分子 掃蕩宣言)>을 배포하였다.

1926년 7월 안창호가 대독립당 촉성운동을 촉구하자 베이징의 인사들도 여기에 적극 호응하여 북경촉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창립선언서와 간장(簡章)을 기초하였다. 이듬해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 촉성회 연합회의 결성에 참여하여 15인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을 뿐 아니라 5인의 상무위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30년 2월 조성환(曺成煥) 등과 같이 베이징에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를 결성하여 상하이의 한국독립당에 가지 않았다. 1932년 상하이에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을 창당했다가, 1934년 난징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을 결성하는데 참여하였다. 중국 관내지역에서 당시 진행되고 있던 정당통일운동의 결과 1935년 7월 난징에서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결성될 때 신한독립당도 참여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이후 행적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국민대표회 비서장 선출 관련 기사(동아일보 1923년 2월 17일자)ⓒ국사편찬위원회

 

출처 :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