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2022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호남 최초 만세운동인 군산 3·5만세운동의 주역인 이두열(李斗烈 1888~1954)·고석주(高錫柱 1867~미상)·김수남(金壽男1900~1967)·윌리엄 린튼(William A. Linton 1891~1960) 선생을 선정했다.
ㅇ 군산 3·5만세운동은 호남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으로 당시 만세운동에 참여한 인원만 3만 7,000여 명에 달하였고, 사망 및 부상자 등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을 뿐 아니라 이후 전북 곳곳에서 28회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 3․1운동 소식을 들은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선생과 구암교회 부속여학교 교사 고석주 선생은 호남지역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였고, 만세운동이 이루어진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ㅇ 우선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예수병원에 근무하는 직원들, 교회 신자들, 선생들에게 교육을 받아 민족의식을 가졌던 학생들의 독립만세운동 참여를 이끌어냈다.
ㅇ 거사일을 3월 6일 장날로 잡고 학생들과 함께 영명학교에서 비밀리에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인쇄하는 등 차근차근 준비하던 만세운동은 거사 직전, 낌새를 눈치챈 일본 경찰의 급습으로 두 분의 선생과 학생들이 체포, 연행되면서 거사가 좌절될 위기에 처했다.
ㅇ 그 순간, 이를 본 학생간부 등은 긴급회의를 열어 3월 6일로 예정되어 있던 만세운동을 3월 5일로 앞당겼다. 학생, 예수병원 사무원, 교회 신자들은 함께 남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뿌리며 만세를 외쳤고, 거리에 있던 많은 인파가 이 대열에 합세하여 체포된 교사와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군산경찰서까지 나아갔다.
ㅇ 위기를 느낀 일본 경찰은 익산에 주둔하던 헌병대까지 동원하여 만세운동 참가자들을 탄압하였고, 이두열 선생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죄로 징역 3년을, 고석주 선생도 같은 죄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다.
□ 당시 노동일에 종사하던 김수남 선생은 동료 이남률 등과 함께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독립운동에 방해가 되는 친일교육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ㅇ 영명학교의 3·5만세운동 이후 군산공립보통학교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의 학생 감시와 단속은 더욱 심해졌고, 이런 가운데 3월 14일 학생 70여 명이 동맹하여 연서로 퇴학원을 제출하며 항거했다.
ㅇ 일본인 교장과 교사들은 학부형을 소환하여 끈질긴 회유와 협박으로 이를 방해하였다. 이를 지켜본 선생은 독립운동에 방해만 되는 친일학교인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워 버리기로 결심했다.
ㅇ 선생은 이남률과 3월 23일 밤 11시에 학교에 들어가 건물 동남쪽 출입구에서 불을 붙였고, 맹렬히 타들어가 학교 건물 1개 동을 전소시켰다.
ㅇ 친일교육의 상징이던 군산공립보통학교를 불태워 조국독립의 열망을 표현했던 선생은 방화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모진 옥고를 치렀다.
□ 영명학교에서 교육선교를 시작했던 윌리엄 린튼 선생은 미국으로 돌아가 일제의 잔학한 식민통치와 한국인들의 저항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역설하였다.
ㅇ 1912년 22살의 최연소 나이에 선교사로 한국에 온 선생은 교육선교 1년 만에 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여, 한글로 성경을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쳤다. 1917년 전임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선생은 영명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ㅇ 선생은 군산 3·5만세운동 당시 교사들과 학생들의 준비를 묵인하고 은밀히 지원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군산에서 발생한 만세운동 참가자를 잔혹하게 탄압하고 고문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ㅇ 이후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선생은 애틀랜타에서 남장로교 평신도 대회에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애틀랜타 저널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애틀랜타인의 증언’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의 상황을 기고하는 등 지속적으로 한국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주장하였다.
ㅇ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던 선생은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신흥학교가 폐교하기에 이르렀고, 선생도 1940년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
□ 군산 3·5만세운동은 영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계획하고 노동계와 종교계가 조직적으로 전개한 전 민족적, 전 민중적 운동으로 자주독립을 꿈꾸는 우리 민족의 염원과 저항정신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 정부에서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두열 선생과 고석주 선생에게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김수남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그리고 윌리엄 린튼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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