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두 아들,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건 불꽃같은 삶을 살다’
□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유찬희(1884.8.8~1930.2.13)․유기석(1907.1.12~1980.11.27)․유기문(1910~미상) 선생 삼부자(三父子)를 ‘2020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 유찬희 선생은 1883년 8월 8월 황해도에서 태어나 배재학당에서 수학하였으며 슬하에 딸 둘과 아들 둘을 두었다. 장녀는 신덕(信德), 차녀는 신영(信永)이고 장자는 기석(基石), 차남은 기문(基文)이다.
○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보면서 항일의식과 민족의식을 형성하였으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인재를 길러야 한다는 생각에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에서 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 1913년 북간도에서 한인 자치단체인 간민회 등에 참여하여 한인의 식산흥업과 국적취득 등 권익을 옹호하고, 교육과 언론을 통해 한인을 계몽하였다.
○ 1919년 3월에는 독립운동단체의 통일체로서 간도지역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독립기성총회를 조직하였다.
○ 또한 1920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상무총회를 설립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한 자금을 모집하였으며, 대한국민회에서 무장투쟁과 자금을 지원하였다.
○ 1923년 12월에 중국 돈화현에서 조선독립을 위한 항일사상을 고취하는 동성노농공사의 간사로 활동하였다.
○ 이후,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으나 위암으로 1930년 귀국하여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별세하였다.
□ 장남 유기석 선생은 1930년 4월 상하이에서 유자명(柳子明) 등과 아나키즘 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의열투쟁을 촉구하였다.
○ 같은 해 6월 선생은 천진에서 대한독립당주비회 기관지『한국의 혈』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안창호의 유일정당 운동인 대독립당(大獨立黨) 결성운동을 후원하였다.
○ 1938년 김구(金九)와 협력하여 일본 군함 출운환(出雲丸)호 폭침(爆枕)과 상하이지역 일본 책임자 곡정지(谷正之) 공사의 암살을 시도하였다.
○ 1943년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4~1945년 남경(南京)에서 광복군(光復軍) 징모 제3분처 대장으로 광복군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 선생은 광복 후 중국 남통학원, 강소사범학원 등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1980년 별세하였다.
□ 차남 유기문 선생은 1931년 11월 무력 투쟁단체이자 남화한인청년연맹의 의열투쟁 조직인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 결성에 주도적인 참여하여 의열투쟁에서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천진(天津) 폭탄 의거’와 ‘육삼정(六三亭) 의거’, ‘변절자에 대한 숙청’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 또한 선생은 1935년 5월에 흑색공포단원 엄순봉과 이규호와 함께 친일 상하이 거류민회장 이용로와 친일파 옥과빈을 처단한 사건에 참가하였다.
○ 이 사건에 선생은 체포되지 않아 소재불명(所在不明)으로 기소 중지되었으며, 이후 선생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 한편, 정부에서는 세 분의 공훈을 기리어 유찬희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유기석 선생에게는 200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유기문 선생에게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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