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관련

제80회 순국선열의 날 독립유공자 포상

용화(龍華) 2019. 11. 17.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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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농민, 여성 등 독립운동에 헌신한 13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 한다’

- 80 순국선열의 독립유공자 포상 -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 오는 17() ‘제80 순국선열의 날’을 맞아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징역 5년을 받은 김희식(金熙植) 선생  136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한다 밝혔다.

  이번에 포상되는 독립유공자는 건국훈장 31(애국장 7, 애족장 24), 건국포장 9, 대통령표창 96으로, 포상자 생존 애국지사는  (지익표, 95)이며, 여성이 28이다.

   훈․포장과 대통령표창은 80 순국선열의 중앙기념식장과 지방자치단체가 주관하는 기념식장에서 본인과 유족에게 수여된다.

 이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을 받은 분은 1949 포상이 시작된 이래 건국훈장 11,045, 건국포장 1,317, 대통령표창 3,463 15,825(여성 472) 이른다.

 한편, 보훈처는 독립기념관, 국사편찬위원회, 국가기록원, 지방자치단체, 문화원 관련기관과 사료수집 협업체제 강화하, 국내외 소장 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함으로써 독립유공자 발굴·포상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는데 더욱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80 순국선열의 날’ 맞아 주요 포상자의 공적 다음과 같다.

 ❖ 일제 무단통치의 폭압에 항거한 평범한 농민, ‘김희식 선생’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중형을 받은 김희식(金熙植)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무학(無學)의 평범한 농민으로 191941일 경기도 안성 원곡면사무소 앞 등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징역 5년의 중형을 받고 큰 고초를 겪었다. 191941일 선생은 1,000여 명의 면민과 함께 원곡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인근 양성면사무소와 양성면 경관주재소 등을 공격․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일제 행형자료는 선생이 “주재소에 침입하여 비치된 기구를 파훼(破毁)하였다”(예심종결결정, 1920.3.22.)고 적시하였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0.8.10.)과 「형사공소사건부」,「신분장지문원지」 등의 자료에서 활동내용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무단통치로 일컬어지는 1910년대 일제의 폭압에 가장 격렬하게 투쟁하다 만세운동 사건으로는 이례적이라 할 중형을 받은 사례이다. 독립만세운동 당시 전국적으로도 격렬한 항쟁을 벌인 것으로 유명한 경기도 안성시에서 포상을 신청한 것으로, 독립유공자 포상에 지방자치단체와 국가보훈처가 협업한 사례이다.

 ❖ 함께 만세를 부르다 사망한 동지의 운구행렬에 참여하여 고초를 겪은 ‘이만용 선생’

 31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어 태 70도를 받고 고초를 치른 이만용(李萬用) 선생대통령표창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45일 충남 청양군 정산시장 장날에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어 태 70도를 받았다. 당초 정산시장 만세시위는 1백여 명의 장꾼들이 시작하였다가 일제 헌병이 30여 명을 연행하자 7백여 명으로 불어나고 헌병이 이에 발포하여 향교직원 권흥규(權興圭, 1990 애족장)가 사망하는 등 사상자가 발생함으로써 격렬한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이튿날 선생은 1천여 명으로 불어난 시위군중과 함께 권흥규 선생의 운구행렬에도 참여하였다가, 청양 헌병분견소에 끌려가 태 70도를 받았다. 안타깝게도 선생이 태형을 받은 지 불과 4년 뒤1923930대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에서 일제의 악형이 얼마나 잔인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번에 충남 청양군에서 선생을 포함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 태 70도를 받은 29명에게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선생 등에 대한 포상은 일제의 이른바 「범죄인명부」등에서 공적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 임시정부 후원한 ‘통합’ 대한애국부인회의 기독교 신여성, ‘최영보 선생’

 평남 평양에서 임시정부를 후원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여성 독립운동가 최영보(崔永保) 선생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911월 평남 평양에서 대한애국부인회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할 목적으로 독립운동자금 모집과 독립운동 지원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징역 2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주목되는 것은 대한애국부인회가 31운동 직후 조선독립의 목적 달성을 위해 평양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 장로파와 감리파의 통합으로 결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통합을 바탕으로 대한애국부인회는 단기간에 2,400여 원이라는 거금을 임시정부에 보낼 수 있었고 그 여세를 몰아 평남 일대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지회조직 결성을 추진하였다. 당시 선생은 대한애국부인회 진남포 기독교 장로파 지회장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경남 마산의 기독교계 사립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기독교 여성으로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이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신분장지문원지」,「동아일보」,「매일신보」,「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등에서 공적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 저항과 투쟁으로 불꽃처럼 살다 간 여성 독립운동가, ‘송계월 선생’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에 참가, 세 차례나 투옥된 여성 독립운동가 송계월(宋桂月) 선생건국포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12년 함남 북청 출신으로, 19285월 경성여자상업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에 참여하다 체포되었고, 19301월 서울에서 광주학생운동 지지시위를 주도하다 체포되어 징역 6, 집행유예 3을 받았으며, 이듬해 6월에는 경성여자상업학교 졸업생 신분으로 모교의 동맹휴학을 선동한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다. 특히 19301월 광주학생운동 지지시위 당시 선생은 자신의 하숙집을 서울지역 여학교 대표들의 밀의장소로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본인은 여학교 간 연락을 맡아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와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연락을 전담함으로써 서울지역 시위 확산에 크게 기여하였다. 졸업 후 ‘문예방면’을 꿈꾸던 선생은 1933531일 요양 중이던 함남 북청의 자택에서 2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당시 신문은 “양()은 여자상업학교 출신으로 일시는 상점의 점원이 된 일도 있었으나, 타고난 재질은 문예방면에 있어 드디어 잡지계로 방향을 전환하여 개벽사 기자로 지금까지 내려왔고, 한편으로 소설의 창작을 시험하여 문단으로부터 상당한 인정을 받았다”(동아일보, 1933.6.2.)고 하며 선생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동아일보」,「매일신보」,「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등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활동내용이 확인되어 이루어졌다.


 ❖ 중국에서 임시정부 지원에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 ‘강영파 선생’

 중국 상해와 중경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단체 등에서 활동하며 임시정부 지원에 헌신한 여성 독립운동가 강영파(姜英波) 선생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다. 선생은 19308월 중국 상해에서 상해여자청년회 창립대회 주비위원(籌備委員) 및 임시위원으로 활동하고 19324월 동 회의 총무부장으로 활동했다.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동한 뒤 1942한국애국부인회가 재건되자 재무부 주임을 맡았으며 19443월에는 임시정부의 여당격인 한국독립당 당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선생은 한국광복군사령부 군의처장으로 활약하고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낸 유진동(劉振東) 선생(2007년 애국장)의 부인이기도 하다. 여성 독립운동가로서 1930년대부터 광복 때까지 상해와 중경 등지에서 임시정부 지원과 독립을 위한 선전활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한 사례이다. 선생에 대한 포상은 「외무성경찰사」등 일제당국의 정보문서와 「신한민보」등에서 독립운동 공적이 확인됨으로써 이루어졌다.

   ※ 붙임  1. 정부 포상자 전체명단 1
 

참고 1

 

 정부 포상자 전체 명단(136)



 건국훈장 애국장 (7)

권태용 權泰用 (국내항일) 김성남 金聖男 (국내항일) 김희식 金熙植 (3·1운동) 남왈성 南曰星 (국내항일)

박문호 朴文昊 (국내항일) 소갑호 蘇甲浩 (국내항일)    (국내항일)

 건국훈장 애족장 (24)

강영파 姜英波 (임시정부) 고삼현 高三鉉 (국내항일) 권태규 權泰圭 (국내항일) 권헌상 權憲尙 (국내항일)

김두성 金斗性 (국내항일) 김수도 金壽道 (일본방면) 김종상 金鍾商 (3·1운동) 김판곤 金判坤 (국내항일)

김행규 金杏奎 (국내항일) 노헌용 盧憲容 (3·1운동) 신균우 申均雨 (학생운동) 양병시 梁秉時 (국내항일)

양재옥 梁在玉 (3·1운동) 유춘삼 柳春三 (3·1운동) 윤종건 尹鍾健 (3·1운동) 이백춘 李白春 (일본방면)

이부성 李富星 (3·1운동) 이성옥 李成玉 (3·1운동) 이신형 李信珩 (학생운동) 장백윤 張伯允 (국내항일)

장재섭 張在燮 (국내항일) 정봉안 鄭鳳安 (3·1운동) 조정구 趙鼎九 (국내항일) 최영보 崔永保 (국내항일)

 건국포장 (9)

김승탁 金承鐸 (국내항일) 송계월 宋桂月 (학생운동) 신문관 申文官 (국내항일) 윤충식 尹忠植 (국내항일)

이굉상 李宏祥 (3·1운동) 이봉세 李鳳世 (3·1운동) 임교재 任敎宰 (국내항일) 전인발 錢寅發 (국내항일)

정구석 鄭求奭 (국내항일)

 대통령표창 (96)

강명순 姜明順 (국내항일) 강정순 姜貞順 (3·1운동) 강종렬 康鍾烈 (3·1운동) 고건주 高健柱 (3·1운동)

고성준 高成俊 (3·1운동) 김금남 金錦南 (학생운동) 김동은 金東殷 (3·1운동) 김복선 金福善 (학생운동)

김상녀 金上女 (학생운동) 김성모 金聖姆 (국내항일) 김세지 金世智 (국내항일) 김순배 金順培 (3·1운동)

김영두 金永斗 (국내항일) 김용상 金容相 (국내항일) 김이순 (3·1운동) 김인수 金寅洙 (3·1운동)

김일봉 金日奉 (3·1운동) 김자현 金慈賢 (학생운동) 김재록 金在錄 (국내항일) 김재순 金在淳 (3·1운동)

김종호 金鍾浩 (학생운동) 김창환 金昌煥 (국내항일) 김택현 金澤顯 (국내항일) 나종남 羅鐘南 (학생운동)

남남덕 南男德 (국내항일) 문창래 文昌來 (국내항일) 박계수 朴桂洙 (학생운동) 박상술 朴相述 (3·1운동)

박선봉 朴先奉 (학생운동) 박철룡 朴喆(3·1운동) 변수남 卞水男 (3·1운동) 서만석 徐萬石 (국내항일)

서홍렬 徐洪(학생운동) 송병호 宋秉好 (3·1운동) 승천일 昇千一 (학생운동) 안갑남 安甲男 (학생운동)

양봉원 梁奉源 (3·1운동) 윤동의 尹東儀 (3·1운동)    (3·1운동) 윤만영 尹萬榮 (3·1운동)

윤옥분 尹玉粉 (학생운동) 윤을희 尹乙姬 (학생운동) 윤재병 尹在炳 (학생운동)    (3·1운동)

   (3·1운동) 이강오 李康午 (학생운동) 이강후 李康厚 (학생운동) 이계삼 李啓三 (3·1운동)

이관규 李觀圭 (3·1운동) 이구현 李九鉉 (3·1운동) 이다애 李多愛 (학생운동) 이동하 李東夏 (3·1운동)

이두상 李斗相 (3·1운동) 이만용 李萬龍 (3·1운동) 이만용 李萬用 (3·1운동) 이명하 李明夏 (3·1운동)

이보동 李保東 (국내항일이성수 李性秀 (3·1운동) 이성수 李性洙 (학생운동) 이성실 李誠實 (국내항일)

이송죽 李松竹 (학생운동) 이순길 李順吉 (국내항일) 이순옥 李順玉 (국내항일) 이시현 李時鉉 (3·1운동)

이영출 李英出 (국내항일) 이원태 李源泰 (3·1운동) 이일선 李日先 (국내항일) 이재영 李載英 (3·1운동)

이점길 李點吉 (3·1운동) 이종현 李鍾鉉 (3·1운동) 이진철 李鎭哲 (국내항일) 이충신 李忠信 (학생운동)

이현구 李鉉球 (국내항일) 임응순 任應淳 (3·1운동) 장두현 張斗鉉 (3·1운동) 전금옥 (국내항일)

전연봉 全蓮峯 (학생운동) 전재식 (3·1운동) 전종관 全鍾琯 (학생운동) 정남이 鄭南伊 (학생운동)

조금복 趙今福 (3·1운동) 조재명 趙在明 (3·1운동) 조재원 趙在元 (3·1운동) 조재창 趙在昌 (3·1운동)

조종옥 趙終玉 (학생운동) 지익표 池益杓 (학생운동) 채판진 蔡判鎭 (국내항일) 최명술 崔命述 (3·1운동)

최몽길 崔蒙吉 (3·1운동) 최한원 崔漢元 (국내항일) 최희선 崔熙善 (학생운동) 한독신 韓篤信 (국내항일)

허창두 許昌斗 (학생운동) 홍옥인 洪玉仁 (학생운동) 홍의식 洪懿植 (국내항일) 황성인 黃聲仁 (3·1운동)

출처 :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