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관련

10월 독립운동가 임천택 / 서병학 / 박창운

용화(龍華) 2024. 10. 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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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택( 1903 ~1985 , 애국장 (1997)

1903년에 태어났다. 모친을 따라 멕시코로 건너올 때가 2살이었다. 멕시코에서 쿠바로 재이주한 것은 그의 나이 18살이 되던 때였다. 어린 시절을 멕시코에서 보냈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멕시코는 ‘제2의 고향’이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은 쿠바였다. 그는 쿠바에서 결혼을 하여 슬하에 5남 4녀를 두었다. 개인적인 생활뿐만 아니라, 국민회 지방회 활동, 교육활동, 종교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멕시코와 쿠바 지역에서 전개한 활동의 기저에는 ‘독립’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서병학 , (1885) ~미상 , 애족장 (2021)

1885년에 태어났다. 동생 서병욱이 서울에서 상업활동을 하고 있었다. 본인도 이민 오기에 앞서 장사로 가정을 꾸려 갔던 것으로 짐작된다. 서병학의 어린 시절 삶을 말해주는 자료가 부족하여 세부적인 삶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그 역시 1905년 4월 4일 1,033명의 한인들과 함께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4년간 중노동을 했다. 1921년 멕시코 한인 일부가 쿠바로 재이민 갔을 때 동석했다. 멕시코와 쿠바 한인 사회를 이끌었으며, 대한인국민회에서 활동하며 ‘독립’을 위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았다.

 

박창운 , 1889 ~미상 , 애족장 (2011)

1889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영향을 받아 한국의 자유와 독립 쟁취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1905년 4월 4일 1,033명의 한인들과 함께 멕시코 에네켄 농장에서 4년간 중노동을 했다. 멕시코에서 사용한 이름은 박 라몬(Ramon Pack)이다. 1910년 1월 26일 멕시코 메리다에서 현항건의 딸 현귀봉(뒷날 현미숙으로 개명, 멕시코 이름은 현 후아기나)과 결혼했다. 이들은 6남매를 두었다. 1921년 3월 200여 명의 한인과 쿠바로 재이주했다. 같은 해 6월 마탄사스로 이주하여 평생을 살았다. 그 또한 멕시코와 쿠바에서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세 사람이 남긴 향기

멕시코와 쿠바의 한인들은 빼앗긴 조국을 찾기 위해 대한인국민회 지방회를 조직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대한인국민회는 ‘무형의 한족정부(韓族政府)’라 불릴 만큼 1910년대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이었다. 1910년대 미주 지역에서 국민회는 한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정부 역할을 맡았다. 독립운동의 지도 기관을 자임했다. 대한인국민회 지부가 멕시코에는 1909년, 쿠바에는 1921년 설립되어 한인의 이익을 옹호하고 독립운동을 지도하는 기관으로 역할을 다하였다.

멕시코에 이민 온 세 사람은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도 대한인국민회와 조국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쏟았다. 이들은 멕시코 지방회에서는 한 사람당 1페소의 월 연금을 거리낌 없이 정기적으로 납부했다. 대한인국민회 총회에 의무금·가옥채·기계채 등의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국민회에 필요한 각종 특별의연을 모집하고, 동맹 저축, 애국 동맹금을 거둘 때 기꺼이 돈을 냈다. 1919년 1월에는 파리강화회의 대표자 파견을 위해 특별의연으로 1인당 20페소 이상을 거두었다. 3.1 운동 기간에는 메리다 지방회 소속의 한인들이 1919년 12월 1일까지 중앙 총회에 보낸 돈이 약 1,000달러가 넘었다.

메리다 지방회 설립 직후 일어난 멕시코 혁명의 영향으로 한인들은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이 기간 멕시코 한인 사회에는 인구 이동이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한인들은 심각한 생활난과 경제적 상승을 위해 끊임없이 옮겨 다녔다. 그 가운데는 경제적 상황이 훨씬 좋은 미국으로 간 사람도 있었고, 1921년에는 쿠바로 집단 이민을 떠나기도 하였다. 임천택, 서병학, 박창운은 멕시코에서 쿠바로 이민 간 대표적인 지도자들이었다.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멕시코와 쿠바 지역 한인들은 대한인국민회를 중심으로 상호 단결을 통하여 한인들의 이익을 옹호하고, 민족적 정체성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했다. 경제 상황이 좋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쏟았다.

세 사람은 멕시코와 쿠바 한인들을 국민회를 중심으로 단결시켰다. 한인 사회를 안정시키는데 지도력을 발휘했다. 나아가 독립운동을 일생에 거쳐 적극 후원한 점이 높게 평가된다. 숭무학교를 설립하여 군인을 양성하여 원동 지역의 독립군으로 보낼 계획을 추진하였다는 사실은 무장투쟁 분야 독립운동의 측면에서도 의미가 깊다.

 

출처 : 국가보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