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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국 이야기

용화(龍華) 2024. 2. 10.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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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룻날, 떡국이 팔릴 것 같지 아니하여 화동 어떤 떡국집 주인에게 물어보았더니, “서울에 집이 있는 사람이야 누가 오늘 같은 날 떡국을 못 먹겠습니까마는 오늘 떡국을 먹지 못하면 까닥없이 섭섭하다 하여, 부모를 떠나 시골서 올라온 학생들의 주문이 하도 많기에 이렇게 문을 열었습니다.


〈지방 학생 위해 떡국집은 개점〉 1926년 2월 14일자 동아일보 4면


예나 지금이나 설에 떡국을 먹지 못하면 섭섭했던 건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기사가 쓰인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음력설은 홀대하고 양력설을 강요했던 일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신문에서 떡국 먹는 풍속 등 명절 분위기를 담을 만큼 음력 설은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당시 일제는 '이중과세'(二重過歲)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양력 설 한 번만 챙길 것을 주장했습니다. 이중과세라 하면 세금을 두 번 매긴다는 의미처럼 들리지만 여기서는 새해를 두 번 쇤다는 뜻입니다. 낭비는 이중과세의 대표적 폐해로 꼽혔습니다. 부지런히 일해야 하는 국민들이 양력설과 음력 설 두 번이나 쉬는 걸 구실 삼았죠.


문제는 해방 이후에도 역대 대통령들이 나서 이중과세 금지를 주창하면서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1950년부터 무려 1970년대까지 정부가 나서서 음력설을 쇠는 일은 시간 소비와 물자를 낭비하는 행태라며 비판하고, 단일과세 풍속 정착을 위해 대책을 마련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방앗간에서 떡짓기 금지'입니다. 정부당국이 작성했던 기록도 고스란히 남아있습니다.

                      1953년 작성된 '음력 과세방지에 관한 건' [국가기록원]


1953년도 국무총리비서실에서 제작한 ‘음력 과세방지에 관한 건’을 살펴보면 설 명절에 ‘떡방아, 가축 살해, 가주조(집에서 술빚기)등을 단속하여 물자 소비를 방지할 것’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차례를 지내고 음복을 하려면 음식이 필요한데 정부가 나서서 방앗간과 정육점 셔터를 강제로 내린 것입니다. 각 지자체에서도 단속반을 꾸려 특별단속에 나섰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물론 ‘이중과세’ 금지 지침에도 와중에도 음력 정월 초하루만 되면 떡방앗간에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동안 음력으로 설을 지내온 국민의 정서를 바꾸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유신 이후인 1974년에도 이중과세는 정부의 골칫거리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집권 기간인 1974년, 행정자치부 의정관리국에서는 '신정 단일과세의 정착화를 위한 지시'라는 지침을 마련했습니다.

1974년 행정자치부 의정관리국에서 작성한 '신정단일과세의 정착화를 위한 지시' 문건 [국가기록원]


음력 설 대신 양력설을 장려하기 위해 부처별로 대책을 꾸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건을 보면 농수산부에서 구정 때 양곡과 육류 소비를 절약하자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반면 양력 설에는 떡국 차례, 떡국 먹기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펼쳤다고 전해집니다. 떡국을 신정 단일 과세 정책에 이용한 셈이죠.


지극히 정치적이었던 떡국이 언제부터 민족을 대표하는 새해 음식이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떡국에 대한 기록은 조선 중기 때 본격적으로 등장합니다. 조선 중기 문인인 이식이 쓴 '택당집'에서는 '새해 첫날의 제사상을 차릴 때 병탕(餠湯)과 만두탕을 한 그릇씩 올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병탕을 풀이하면 떡을 넣고 끓인 탕 정도 되겠습니다. 이후 조선 후기 세시풍속을 적은 서적 '동국세시기'와 '열양세시기'에는 떡국은 새해 차례와 아침식사 때 없으면 안 될 음식이며, 손님 접대용으로 꼭 내놓았다고 적혀 있습니다.


동국세시기는 떡국이 하얗다고 해서 '백탕'(白湯)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기록된 떡국은 지금의 떡국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지금은 소고기 국물로 맛을 낸 반면, 그 시절 떡국은 꿩으로 육수를 내고 고춧가루를 넣었습니다. 떡 모양 역시도 엽전 모양이었습니다. 어슷하게 썰어 세로로 길쭉한 오늘날의 떡국점과는 다르죠. 고춧가루는 꿩고기의 잡내를 없애기 위함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동그랗게 썬 떡국점은 엽전과 새해의 해 모양을 상징했습니다. 떡국을 먹으면 한 살을 먹었다고 하는 이유도 이 때문입니다. 떡국의 또 다른 이름은 ‘첨세병’인데 이는 나이를 하나 더 먹는 떡이라는 뜻입니다. 조선시대 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청장관전서〉에서 떡국을 ‘첨세병(添歲餠, 나이를 더하는 떡)’이라고 하며 더 이상 나이를 먹고 싶지 않다고 한탄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시대에도 나이 먹기 싫은 건 지금과 똑같았나 봅니다.

떡국

출처 : 헤럴드경제 2024. 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