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민관폭파의거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125. 서울시의회 본관 정문 앞에는 ‘부민관 폭파 의거 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1945년 7월 24일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세 청년의사가 부민관에서 친일부역자 박춘금 일당이 한국인들을 일본의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를 개최하자 행사장에 폭탄을 터뜨린 사건이다. 『경향신문』은 이 의거를 “36년간에 걸친 항일투쟁에 마지막 종지부의 예포를 울린” 사건이라 하였고, 한 연구에서는 “일제강점기 최후의 의열투쟁”이라는 의의를 부여하였다. 이 의거의 계기가 된 ‘아시아민족분격대회’는 1945년 6월 24일 박춘금 등 친일세력이 일본인과 함께 부민관에서 조직한 대의당이 한 달 후인 7월 24일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개최한 어용집회였다.
이에 1945년 1월 일본에서 귀국한 유만수와 조문기가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함께 근무한 강윤국을 비롯한 동지들을 규합하여 1945년 3월 조직한 대한애국청년당이 결행한 사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의거와 이 의거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부민관폭파의거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한 원인으로 보인다.
2. 유만수의 활동(柳萬秀,1921 ~1975 , '90애국장)
안성군 금광면 개산리 출신인 유만수 지사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조문기의 회고록인 『슬픈 조국의 노래』(민족문제연구소, 2005.)에 따르면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유만수는 1923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하여 만주에 갔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국 후 일본강관주식회사에 동원되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독립운동에 뜻을 두게 된 배경에는 어린 시절 소작으로는 더 이상 연명할 수 없어 철도 공사판에서 노동을 하던 아버지가 일본인에 비해 턱없이 적은 임금을 받았던 점, 공사 중 많은 안전사고가 발생하였지만 그날 일당만 주고 조선인 노동자를 해고하는 현실, 특히 자신의 아버지가 안전사고로 인해 발을 다치고 해고되어 그의 가족들이 무일푼으로 농촌을 떠나 도시빈민이 되어야 했던 경험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식민지 조선의 현실과 경험에서 그는 식민지 조선인의 차별받는 현실을 몸소 체험으로 알게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한성공업학교 야간부에 적을 두고 낮에는 신문을 돌리고 공장에 나가 노동을 하면서 미래를 준비했으나 식민지 현실에서 조선 청년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즉 그는 식민지 조선의 현실이 자신의 현실이자 극복해야 할 과제임을 깨달았고 독립만이 자신과 민족의 살 길이라는 생각을 품고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의 망명을 계획했다.
그러나 그는 만주에서 독립운동 조직을 찾을 수 없어 6개월만에 조선으로 귀국하여 “국내에서 일본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일을 벌여” 보고자 했으나 동지 없이 혼자서 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일본에서 “일을 벌이기 위해” 훈련공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하여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가 배치받은 곳은 일본강관주식회사 가와사키(川崎)공장이었다. 여기에서 그는 평생의 동지인 조문기와 강윤국을 만나게 되었다. 이 가와사키공장에서 유만수는 조문기 등과 함께 1943년 파업을 주도하였다고 한다. 같은 시기 이 공장에 근무하였던 김경석(金景錫)의 기억과도 상당부분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슬픈 조국의 노래』에는 가와사키공장 파업이 1944년 5월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1943년 5월이 맞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보안과(保安課)에서 발행한 『特高月報』에도 1944년 5월에는 파업이 없었고, 1943년 5월에 파업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파업 이후 그는 일본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고, 서상한의 도움으로 1944년 11월 조문기와 함께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박춘금 등 친일 거두를 처단하기 위해 조문기, 강윤국, 우동학, 권준 등과 함께 1945년 3월 대한애국청년당을 조직하였다. 이들은 모두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훈련공으로 있던 인물들로서 대한애국청년당은 일본강관주식회사에서 인연을 맺은 인물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였다. 대한애국청년당은 유만수와 조문기가 일본에서 귀국하기 직전 수립하였던 독립운동 계획에 따른 것으로 귀국 이후 동지 규합, 비밀단체 구성, 친일 거두와 침략 원흉 처단, 중국행이라는 4단계 계획이었다. 유만수는 대한애국청년당의 임시의장이 추대되었고, 바로 이 대한애국청년당이 조직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행한 의거가 부민관폭파의거였던 것이다. 이 의거에 사용할 다이너마이트를 구하기 위해 유만수는 다이너마이트 발파작업장에 취직하여 매일같이 소량의 다이너마이트를 빼왔고, 10여일 후에는 뇌관 2개를 반출하여 이를 시한폭탄으로 제작하여 의거 당일에 사용하였다.
3. 강윤국의 활동 (康潤國,1926 ~2009 , '90애국장)
강윤국 의사는 1926년 9월 28일 서울 중림동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진주이며 강백(姜伯)이라는 이름도 사용했다. 부민관폭파의거의 또 다른 주역인 조문기의 회고록 『슬픈 조국의 노래』에는 강윤국은 국수공장을 하는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성장하였다. 호탕한 성격에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다혈질적인 성향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보통학교 졸업 후 고등교육을 받고 싶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견습공 모집 공고를 보고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결정하였다고 한다. 일본 생활을 통해 그는 일본은 “전쟁 물자를 만들 일손이 필요할 뿐 조선인에게는 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아 독립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가 발급받아 보내준 가짜 폐병 진단서를 회사에 제출하여 유만수, 조문기보다 2년여 먼저 귀국하여 마음을 잡지 못하였다. 가슴이 짓눌리는 강박에 시달리며 답답한 하루하루를 견디어 왔다고 한다. 이는 일제의 식민지라는 현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살아가야 했던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던 중 그가 살던 곳은 유만수의 관수동 집과 불과 5분 거리에 있었는데, 어느날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강관주식회사의 동료 유만수의 권유로 대한애국청년당에 가입하였다. 이들은 친일 거두 3명, 총독부 인사 3명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할 것을 결의하였다. 제1순위로 거론된 인물은 박춘금이었다. 박춘금은 가난을 이기려고 일본으로 건너가 탄광갱부, 노무자 등으로 전전하다가 일본의 폭력조직인 흑룡회 인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거물 폭력배로 성장한 인물이다. 특히 1920년 도쿄에서 일선융화(日鮮融和)를 표방하면서 조직된 상구회(相救會)의 회장이 되었고, 상구회는 1921년 상애회(相愛會)로 개편하였다. 그는 상애회 회장으로서 1923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조선인 노무자 300명으로 노동봉사대를 결성하고 시체 처리와 조선인 노무자 색출 및 수용 작업에 종사하였고, 1928년에는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를 납치, 폭행하였으며, 1932년 도쿄 제4구에 입후보하여 일본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전쟁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각종 친일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하는 동시에 각종 시국강연회에 강사로 참여하여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는데 노력하였다. 특히 1945년 6월 대의당을 조직하여 당수에 취임하였다. 이에 대한청년애국당은 박춘금을 제1순위 처단 대상자로 삼았다.
박춘금 처단을 위해 유만수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다이너마이트를 조달하였으며, 강윤국은 아버지 국수공장에 자주오던 일본군 헌병 장교에게서 권총을 탈취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다. 또한 강윤국이 서울 장사동에 대한애국청년당의 비밀아지트로 구해놓은 하숙방에서 시한폭탄을 제작하였다. 드디어 1945년 7월 24일, 강윤국, 유만수를 비롯한 대한애국청년당은‘아시아민족분격대회’가 개최된 부민관으로 향하여 폭탄을 설치하여 대회장을 폭파하였다. 의거 이후 유만수, 강윤국, 조문기 등은 체포되지 않고 피신하여 해방을 맞이하였다.
4. 부민관폭파의거의 의의
이 의거는 일본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이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결행된 사건이었다. 이는 독립운동이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끊임없이 전개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점이 이 의거가 역사적으로나 독립운동사적으로 다음의 몇 가지 점에서 커다란 위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첫째, 이 의거의 주인공들은 1920년대 이후 출생하였다. 비록 반식민지 상태에 있었지만 ‘독립’을 경험하지 못한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던 사건이었다. 이러한 그들이 일제의 민족차별에 분노하면서 의거를 일으켰다. 그 시기가 일제의 지배가 ‘엄혹’이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말 그대로 ‘엄혹’한 시대적 배경하에 일어났다는 점이다. 즉 패망 직전 일제가 단말마적으로 조선민족을 전쟁에 동원하던 전시체제 말기 식민지 수도 한복판인 경성부의 부민회관에서 거행된 친일집회에 의거를 행하였다. 더욱이 한 개인의 활동이 아니라‘대한애국청년당’이라는 조직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해방 직전까지 국내에서 독립운동단체가 활동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다.
둘째, 이들이 독립운동을 ‘직업적’으로 했던 인물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만수와 조문기에게서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한 이력들을 찾을 수 있으나 강윤국, 우동학, 권준 등에게서 자료의 한계상 이를 찾을 수 없었다. 즉 독립운동세력과 연결되지 않은 인물들이 자생적, 자발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이 시기 식민지 조선민중들에게 일제의 식민지 지배는 타도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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