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광복의 씨를 뿌리고, 교육으로 구국의 길을 찾다’
- 2020년 3월의 독립운동가, 김세환 선생 선정 -
□ 국가보훈처(처장 박삼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김세환(1889.11.18. ~ 1945.9.26.) 선생을 2020년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고 밝혔다.
○ 선생은 수원에서 출생하고 청소년시기에 교회에서 선교활동과 함께 교육과 구국활동을 펼치는 인물들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하였다. 이들의 영향으로 교육가 및 독립운동가로서 꿈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 선생은 독립을 위한 신(新)학문의 중요성을 깨닫고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 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에서 유학했다. 1909년 말경 귀국하여 수원상업강습소(현 수원중·고)와 삼일여학교(현 매향여중·고)에서 교사로 활동하며 후진양성을 위해 지역사회의 중추적 인물을 배출하고 민족의 진로를 모색하는데 앞장섰다.
○ 이후, 미국 윌슨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소식을 듣고 이를 독립의 기회로 삼고자 3·1운동 준비모임에 참여하였고, 민족대표 48인의 한사람으로 ‘순회위원’이란 막중한 임무를 띠고 수원지역의 3·1운동을 기획 및 지도하였다.
○ 만세운동 참여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선생은 기개를 잃지 않았고, 법정에서는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할 것인가?”라는 검사의 질문에 선생은 “그렇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하여 독립에 대한 결연한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다.
○ 법정에서 선생의 자세는 재판 과정을 지켜보던 한국인들에게 큰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선생은 1920년 10월 30일 경성지방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 선생은 1920년대 초부터 추진되던 민립대학설립운동에 수원지역을 대표하여 참여하였고 신간회 수원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박선태·김병호 등과 함께 수원체육회를 결성하여 수원지역의 민족운동을 조직적으로 강화하고자 하였다.
○ 1939년 폐교 직전의 위기에 빠진 삼일학교를 구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으며 1941년에는 수원상업학교를 설립하여 해방되기까지 교육에 힘썼던 선생은 1945년 9월 26에 숨을 거두었으며, 개인묘지에 묻혔던 선생의 유해는 1968년 국립묘지로 안장되었다.
□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세환 선생
출처: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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