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이야기

안동(일직)손씨 독립유공자

용화(龍華) 2019. 4. 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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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東(一直) 孫氏 獨立有功者(서훈연도,항렬순)

성명 한자 운동계열 포상 훈격 본적 공적내용
손양윤 孫亮尹 만주방면 1977 독립장 경북 달성 아래 공훈록참조
손일민 孫逸民 임시정부 1990 애국장 경남 밀양
손경헌 孫庚憲 만주방면 1990 애족장 경남 밀양
손기찬 孫基瓚 국내항일 1990 애족장 경북 칠곡
손기석 孫基錫 3.1운동 2011 대통령표창 경남 밀양
손기현 孫基賢 만주방면 2016 대퉁령표창 경남 밀양 " (위 손일민의 6촌형)
손종헌 孫綜憲 국내항일 2019 대통령표창 경남 밀양
손기욱 孫基郁 국내항일 2019 건국포장 경남 밀양

                            *훈격 구분 : 대한민국장>대통령장>독립장>애국장>애족장>건국포장>대통령표창 

 

1.손양윤(孫亮尹,이명 : 伯見, 亮伊)

생몰 : 1878.02.04.~1940.12.12. 62

본적 : 경상북도 달성 城北 西邊

주소 : 慶北 達城 城北 西邊

수록정보 : 독립유공자공훈록 4(1987년 발간)

포상 : 1977년 건국훈장독립장

공훈록

경북 달성(達城) 사람이다. 일제가 국권을 침탈하자 항상 조국 광복의 염원을 품고 동지들과 그 방안을 상의하였다. 1916년 채기중(蔡基中박상진(朴尙鎭노백린(盧伯麟김좌진(金佐鎭) 등이 조직한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던 중 1917년 일경에 체포되어, 1918131일 고등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이 확정되었다. 19248년형으로 감형됨에 따라 출옥하였으나 그의 의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출옥후 만주 길림(吉林)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였으며, 신현규(申鉉圭이병묵(李丙默) 등과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266월경부터 경남지방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5천여원의 군자금을 신민부에 전달하였으며, 일본인으로부터 현금 5백원, 엽총 2정 등을 빼앗아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지 윤치백(尹致伯김보연 등이 만주로 복귀하기 위하여 들어가던 도중 밀정 서()모라는 자의 밀고로 체포됨에 따라, 손봉현(孫鳳鉉신현규(申鉉圭신양춘(申陽春윤창선(尹昌善) 등의 동지가 모두 체포되었다. 그도 서울 태평로에 있던 삼통여관(三通旅舘)에서 동지들과 함께 1928730일 체포되었으며, 신현규·신양춘의 두 동지는 일경의 악랄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동년 8월에 재판도 받지 못하고 변사(變死)하였다.

그는 결국 19299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다가 동년 1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20년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10여년간 옥고를 치르다가 1940년 말에 중병으로 가석방되었으나 10여일만에 순국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판결문(1929. 12. 2 경성복심법원)

일제침략하한국36년사 8885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519

동아일보(1928. 8. 17, 8. 21, 1929. 3. 5, 5. 21, 6. 26, 9. 26, 12. 3)

2.손일민(孫逸民,이명 : 一民, 基鼎)

생몰 : 1884.08.15.~1940.08.00. 56

본적 : 경상남도 밀양 산외 다죽249

주소 : 중국 상해

수록정보 : 독립유공자공훈록 5(1988년 발간)

포상 : 1990년 건국훈장애국장

공훈록

경상남도 밀양(密陽) 사람이다. 국권이 침탈되자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환인현(桓仁縣)에서 동창학원(東昌學院)을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고 한다.

1915년 음력 12월에 만주 길림(吉林)에서 우이견(禹利見) 주진수(朱鎭洙) 등과 협의하여 국권회복과 조선독립이 목적인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우선 국내에서의 독립단 형성을 목적으로 군자금 모집을 계획하였다. 이에 1917년 음력 8월 서울 인사동의 어재하(魚在河)와 경북 풍기의 채기중(蔡基中) 집에서 광복회 명의의 포고문을 작성하여 경북과 충남의 자산가에게 우편으로 발송하는 등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1918년에는 길림(吉林)에서 3 1독립선언에 앞서서 여 준(呂準) 정안립(鄭安立) 김동삼(金東三) 39인과 함께 대한독립선언을 서명 발표하였다. 조소앙(趙素昻)이 기초한 것으로 되어 있는 대한독립선언문은 본격적인 독립투쟁을 목표로 한 내용이었다.

1919년에는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단장 조맹선(趙孟善)과 협조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19201월에는 길림의 대한군정사(大韓軍政司)에서 여 준 박찬익 등과 함께 무기운반에 관한 비밀회의를 열어 무장독립투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1925년 봄에는 신민부(新民府) 검사원(檢査院)의 위원으로 추천되어 독립운동의 조직화와 그 체계화에 전심전력하였다. 그는 독립운동이 크게 성과를 거두지 못하는 것은 개별항쟁의 조직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여 이 같은 조직화 운동에 앞장섰던 것이다.

1927년에는 일제의 추격을 피하여 하얼빈으로 갔다가, 곧이어 북경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34년에는 한국독립당 북경지부에서 조성환(曺成煥)의 지시 아래 활동하다가 이듬해 여름에는 남경으로 옮겨가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7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임시의정원의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어 중국정부와의 유기적인 연락관계를 취하면서 조국 독립에 기여하였다. 특히 이 시기에 임시정부는 계속 이동 중에 있었기 때문에 안정감을 갖지 못한 가운데 지도체제와 그 이념 정립에 부심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의 상임위원 선임은 임시정부의 획기적인 발전을 위하여 크게 기여한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1940년 한국국민당 이사로 추대되었으며 동 8월 의정원 의원으로 재직 중 병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310 353 361 371 372 465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68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2670 705 897

임시정부의정원문서(국회도서관) 243 244 257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3694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5187 515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160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01105 1106 1109 1110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94 196

무장독립운동비사 78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24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4582 711

 

3.손경헌(孫庚憲,이명 : 奇玉 )

생몰 : 1870.04.06.~1931.08.02. 61

본적 : 경상남도 밀양 丹陽 安包

주소 : 滿洲 奉天省 桓仁縣 六道河子

수록정보 : 독립유공자공훈록 4(1987년 발간)

포상 : 1990년 건국훈장애족장

공훈록

경남 밀양(密陽) 사람이다. 190311월 가족과 함께 만주 환인현 육도하자(桓仁縣六道河子)에 이주하여 농장을 개척하는 한편 국내에서 이주하여 오는 동포들에게 농지를 분배하여 생업을 유지하게 하였다.

19194월에는 환인현에서 교민회장에 선출되었으며, 흥업단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갖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중, 192011월에는 흥업단원 이만준(李萬俊)이 찾아오자 부하 최인제(崔仁濟최성기(崔聖基황문익(黃文益) 등과 함께 국내로 파견하여 군자금 6만여원을 모금하기도 하였다. 당시 그의 부하 독립군은 약 3, 4백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고등경찰요사 272·274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195

 

4.손기찬(孫基瓚)

생몰 : 1886.12.14.~1979.06.03. 93

본적 : 경상북도 칠곡 石積 磻溪 352

주소 : 慶北 尙州 化北 中伐 526

수록정보 : 독립유공자공훈록 7(1990년 발간)

포상 : 1990 건국훈장애족장

공훈록

경북 칠곡(漆谷) 사람이다. 그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1913년에 풍기(豊基)에서 채기중(蔡基中)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광복단(光復團)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활동 등을 하였다. 1915년에 광복단과 대구의 국권회복단(國權恢復團)이 연합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자, 이에 가입·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군자금모집 활동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그는 1916년 음력 6월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의 지시로 자신의 집에 권총을 보관하고 있다가 117일 약목(藥木) 시장에서 채기중·임봉주(林鳳柱유창순(庾昌淳강순필(姜順必) 등에게 교부하여 이들이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한 거사를 도왔다. 이 사건으로 동지들과 함께 피체된 그는 1918101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방해죄로 예심판결을 받았으며, 19199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태() 90()형을 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11673714

판결문(1919. 9. 22 경성복심법원)

 

5.손기석(孫基錫)

생몰 : 1893.10.25.~1925.05.23. 32

본적 : 경상남도 밀양 山內 院西

주소 : 慶南 密陽 山內 院西

수록정보 : 독립유공자공훈록 20(2012년 발간)

포상 : 2011년 대통령표창

공훈록

경남 밀양군(密陽郡)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193월 서울의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윤세주(尹世冑),윤치형(尹致衡)은 동화중학교(同和中學校) 교장 전홍표(全鴻杓)의 지도를 받아 김병환(金餠煥),이장수(李章守),윤보은(尹輔殷) 등을 동지로 규합하여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13일 윤세주 등은 전날 준비해 놓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숨겨 밀양 시장으로 잠입하였다. 오후 130분 장꾼들이 모여들자, 윤세주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고, 그 사이 주동 인물들은 재빨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주동 인물들의 선창에 따라 시위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후 만세시위에 돌입하였다. 다음 날인 14일에는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 160명이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만세시위를 전개하자, 수백 명의 군중이 호응하여 만세를 불렀다. 밀양의 시위에 참여하였다 체포된 손기석은 19191120일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소위 소요,건물훼기,상해로 태() 90()를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1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身分帳指紋原紙(警察廳)

독립운동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3222~223

6.손기현(孫基賢)

생몰 : 1883.~ 미상

본적 : 경상남도 밀양 산외 다죽

주소 : 경상남도 밀양 산외 다죽

포상 : 2016년 대통령표창

공훈록

1920년 중국 봉천성(奉天省) 환인현(桓仁縣)에서 한교공회(韓僑公會) 외교원으로 활동하다 안동 일본영사관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한교공회는 1919년 7월 중국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였다. 손병헌(孫炳憲)ㆍ독고욱(獨孤旭)ㆍ이천민(李天民) 등이 주도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각지에 조사원을 보내 장정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손기현은 1920년 5월경 한교공회 외교원에 임명되어 활동하다 체포되었다. 당시 한교공회 회장은 손병헌, 부회장은 홍순복(洪淳複) 등이었다.

1920년 8월 19일 신의주지방법원(新義州地方法院)에서 이른바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受刑人名簿

   間島地方 不逞鮮人 動靜(1920. 5. 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17

   不逞鮮人 狀況에 關한 報告의 件(1920. 10. 6)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22)

 

7.손종헌 (孫綜憲,이명 : 宣憲,汝玉

생몰 : 1889.01.12.~1930.05.21. 41

본적 : 경상남도 밀양 단장 안법 298

주소 : 경상남도 밀양 단장 안법 298

포상 : 2019년 대통령표창

공훈록   

1919년 4월 4일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丹場面) 태룡리(台龍里)에서 표충사(表忠寺) 승려들과 함께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3개월간 구금 취조를 당했다. 이후 자신의 토지 8천여 평에 달하는 자신의 전 재산을 독립운동에 기부했다고 한다.

1921년 초 조카 손기욱(孫基郁)의 권유로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했다. 흥업단은 1919년 중국 펑톈성(奉天省) 푸쑹현(撫松縣)에서 윤세복(尹世復) 등이 조직한 단체였다. 항일무장투쟁과 독립군기지 건설에 목표를 두었다. 1920년 11월경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들어온 이만준(李萬俊)의 은신처를 제공했다. 1922년 5월경 경상북도경찰부(慶尙北道警察部)에 체포되었다. 1923년 1월 15일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총포화약류취체령시행규칙(銃砲火藥類取締令施行規則) 위반’으로 기소되었다. 10월 16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에서 예심면소(豫審免訴) 처분을 받고 18일에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예심종결결정문(豫審終結決定文)(대구지방법원)

밀양의 독립운동사(강만길 외, 2003) 146, 148, 239면

 

8.손기욱(孫基郁, 이명: 基聖)

생몰 : 1892.12.08.~1971.12.26. 79

본적 : 경상남도 밀양 단장 안법 648

주소 : 경상남도 밀양 단장 안법 648

포상 : 2019년 대한민국 건국포장   

공훈록

1919년 4월 4일 경상남도 밀양군 단장면(丹場面) 태룡리(台龍里)에서 표충사(表忠寺) 승려들이 중심이 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20년 말 밀양에서 흥업단(興業團)에 가입했다. 흥업단은 1919년 중국 펑톈성(奉天省) 푸쑹현(撫松縣)에서 윤세복(尹世復) 등이 조직한 단체였다. 흥업단은 항일무장투쟁과 독립군기지 건설을 목표로 했다. 손기욱은 11월경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들어온 이만준(李萬俊)의 권유로 흥업단에 가입한 것이다. 손기욱은 자신의 백부(伯父)인 손종헌(孫綜憲)을 흥업단에 가입시키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활동하다가 1921년에 한때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기소되었다가, 1921년 11월 8일 마산지방법원 밀양지청에서 기소중지(起訴中止) 처분을 받고 석방되었다. 이후 1922년 12월경 이만준 등이 경상북도경찰부(慶尙北道警察部)에 검거된 이래 손기욱도 함께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대정(大正) 8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강도(强盜), 상해죄(傷害罪)’로 기소되었다가, 1923년 8월 21일 대구지방법원(大邱地方法院) 검사국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예심종결결정문(豫審終結決定文)(대구지방법원:1923. 10. 16)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경상북도경찰부, 1934) 272, 273, 275면

 

참고:공훈전자사료관